2013년 9월 27일 금요일

[메가퀘이크3-3]되살아나는 관동대지진 ~ 수도궤멸·90년째의 경고


2013.8.31 NHK special MEGAQUAKE III
되살아나는 관동대지진 ~ 수도궤멸·90년째의 경고


도쿄만에 떠있는 인공섬.. 이곳에서 지금 다음번 도쿄를 덮치는 지진을 감시하고 있다.
초고감도 지진계로 미소 지진을 관측, 다음번 거대지진의 조짐을 잡으려 하고있다.

관동평야 지하에서는 동일본대지진 뒤에 지진횟수가 꺼림칙하게 증가하고있다.
도쿄대학 히라타(平田直)교수 "지진활동이 많아진 걸 생각하면, 슬슬 다음 관동지진,
광동대지진을 일으킨것같은 매우  큰 지진이 일어날 것도 생각해둘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90년전(1923년9월1일) 근대도시로 발전하던 도쿄에 M7.9 거대지진이 덮쳤다.
관동대지진이다.

왕실거처앞에 펼쳐진 오피스거리 도쿄 마루노우치(丸の内). 90년전의 귀한 영상이
남아있었다. 이곳은 화염에 휩싸여 사람들은 필사적인 소화활동을 하고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지 아사쿠사(浅草). 나카미세(仲見世)에 줄지어있던 점포가
모조리 불탔다.


밀집지역을 흐르는 스미다가와(隅田川). 많은 사람들이 불길을 피하려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망 및 실종자 105,000명. 일본역사상 최악의 지진재해였다.

그러나 어떤 흔들림이 거리를 덮치고 왜 많은 목숨이빼앗겼는지 아직 밝혀지지않은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실은 관동대지진은 과학적인 기록이 처음으로 남겨진 거대지진
이기도 했다. 귀한 기록을 남긴 것은 일본 지진학의 기초를 닦은 이마무라 아키쓰네
(今村明恒)였다. 대지진 전부터 지진을 대비해서 기록하는 것이 중요함을 호소했었다.

"우리의 지진계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시. 좋다. 급히 분석결과를 일본정부에 보고해라."
그러나 이마무라가 남긴 기록은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져, 묻혀있었다.
일본은 과거에 몇번씩 지진을 겪으면서도 교훈을 살리지 못했다.
그것을 반성하며 과학자들은 과거의 지진이야말로 미래를 알수있는 단서가 된다며,
이마무라가 남긴 기록을 최신과학으로 풀어보려 하고있다.

도쿄대학 고우케츠 가즈키(纐纈一起)교수 "다음 관동대지진이 반드시 있을테니까
대비하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1923년 관동대지진을 자세히 조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관동대지진의 지진메카니즘을 해석한 결과, 장래의 리스크가 드러났다.
반복되며 10분간이나 계속되는 길고 극심한 흔들림. 진도7. 그 흔들림의 면적은
고베대지진의 20배 가까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도쿄직하에서 일어나는 지진의 진정한 무서움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만일 또다시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 도쿄에서 뭔일이 벌어지는가.
그동안 90년 사이에 새롭게 조성된 매립지와 주택가를 극심한 흔들림이 때린다.
도시화되고 인구집중된 것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피해가 예상되는 것이다.

최신과학으로 지진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MegaQuake
관동대지진의 실상을 되살려 지금도 도쿄직하에 숨어있는 위협을 살핀다.

MEGAQUAKE III 되살아나는 관동대지진 ~ 수도궤멸·90년째의 경고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전하는 귀중한 영상이 남아있었다.
촬영한 것은 영국 카메라맨. 카메라를 천으로 둘러서 몰래 찍고 있었다.
대지진 직후 계엄령이 선포되어 도쿄는 군의 통제하에 있었다.

차를 타고 찍은 폐허가 된 길거리. 도쿄 츠키지(築地)다. 화면 멀리가 긴자(銀座)다.

이번에 세계각지에 남아있던 영상을 수집해서 분석한 결과,
알려지지 않았던 피해실태가 밝혀졌다.

아사쿠사(浅草)의 영상에는 당시 드물었던 고층건물 료운가쿠(凌雲閣)이
찍혀있었다. 원래 12층이었던 것이 8층밖에 없다. 그 위층은 붕괴된 것이다.



지진은 가나가와현에도 막대한 피해를 끼친 것을 영상으로 알수있다.
2층목조건물은 1층이 짜부러졌다. 요코하마항에서는 매립해서 만든 안벽이 파괴되고,
액상화현상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가마쿠라, 鎌倉)도처에 사태가 나서 주택과 도로를 덮었다.



피해는 흔들림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시즈오카현 이즈, 伊豆) 다리에 걸려있는 큰 배. 쓰나미 피해흔적이다.
쓰나미는 해안선에서 약1km 내륙까지 밀어닥쳤다.
쓰나미 높이는 약9m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수도 도쿄. 피해를 확대시킨 것은 화재였다.
영상으로부터 수도권이 광범위하게 온갖 지진재해를 당했던 것을 알게 됐다.

이런 피해는 어떻게 초래된 것인가.
단서가 될 과학자의 귀중한 기록이 묻혀있었다.
이것은 관동대지진의 흔들림을 포착한 파형이다.
이 기록을 남긴 것은 도쿄제국대학 조교수 이마무라 아키쓰네였다.
이마무라는 일본의 지진학 선구자로서 지진예측에 생애를 바친 인물이다.
관동대지진보다 앞서 도쿄에 대지진이 덮친다고 예측하고, 경종을 울렸었다.

(도쿄제국대학 1905년 지진학연구실)
관동대지진보다 18년전, 당시 지진학은 걸음마 단계의 학문이었다.
뭐든지 암중모색하는 상태였다.

"이마무라 선생님, 뭘 하시는겁니까?"
이마무라 "뭐라니, 지진이 와도 넘어지지 않는 걸음걸이를 시도중이다.
지진학자가 여차할 때 움직이지 못해서는 일이 안되잔나."



(인류의 적 지진을 예지할 것)
오오모리 교수 "이마무라군, 대지진을 예측하는 조사는 순조롭게 진행중인가?"
이마무라 "물론입니다."

이마무라는 고문서 기록을 긁어모아 다음번 대지진이 언제 발생할지 예측하려고
하고있었다.
이마무라 "이번 조사로 떠오른 것은 도쿄의 대지진입니다.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는 대지진은 한정돼있습니다. 최근에는 3번.
1649년(게이안, 慶安), 1703년(겐로쿠, 元禄), 1855년(안세이, 安政)
고작 200년 사이에 3번의 빈도로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난번 지진으로부터 50년 지났습니다."

오오모리 교수 "그렇다면?"
이마무라 "가까운 장래에 또다시 대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참사가 벌어질 것은 분명합니다."

메이지(明治)시대 말기 도쿄는 급속히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목조주택에 살고, 부뚜막과 숯불곤로가 쓰이고 있었다.

이마무라 "지금의 도쿄는 너무나 취약하다. 목조건물은 붕괴된다. 그뿐 아니다.
도처에서 대화재가 날 것이다. 도쿄는 괴멸상태가 된다.
예상되는 피해자수는 10만~20만명."
"그렇게나 많이?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마무라 "지진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손쓸 일은 있다."

지진에 대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
이마무라는 당시 인기가 있던 잡지에 논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이마무라의 논문은 본의 아니게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지진이 당장 닥치는 게 아니냐고 도쿄에서 도망치는 사람이 나타날 정도로
큰 소동이 된 것이다.

(당시 신문)이마무라 박사의 대지진습래설 ~ 도쿄시 대재해 예언
신문이 지진의 무서움만을 센세이션하게 전했기 때문이다.

오오모리 교수 "이마무라군, 당장 논문을 철회하라.
이 소동을 가라앉히려면, 대지진이 온다는 것을 부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마무라 "그러나 그것은 대참사의 가능성을 호소하려고.."
오오모리 교수 "우리는 과학자다. 가능성이나 만일의 경우라는 발언을
세상에다가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이 지경인데 대지진이 온다고 단언할 수 있나."

"신문기자가 왔습니다."
"실례합니다. 이마무라 선생님, 대지진은 언제 옵니까? 설명을.."
오오모리 교수 "그에 관해서 교수인 내가 견해를 밝히겠다.
이마무라군의 설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 말하자면 엉터리라 할수있다.
안심해주기 바란다.."
결국 상사가 부정함으로써 소동은 진정됐다.



'부설(浮説)' 매우 강한 표현으로 비판당한 이마무라는 연구자로서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끝장이네" "이걸로 만년 조교수에 그치겠지."
역경에서도 이마무라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마무라는 대지진에 대비해서 지진계를 서둘러 개발하고 있었다.
기존의 것보다 10배 강한 지진의 흔들림을 계측할 수 있는 성능을 추구했다.

"이정도로는 아직 대지진에 견디지 못해."
"다시 조정해 보갰습니다."
"대지진은 온다. 가까운 시일안에 반드시.."

(이마무라식 지진계)이마무라가 개발한 지진계는 도쿄를 비롯해서 일본전국
7곳에 설치됐다. 설치를 마친 것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8개월전이었다.
이 지진계가 나중에 귀중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1923년7월) 대지진 2달전, 일본해군이 비행선을 써서 촬영한 영상이다.
잿더미가 돼버리기 직전의 도쿄 시가지를 상공에서 촬영한 유일한 영상이다.
막 개업한 도쿄역. 일본의 위신을 걸고 건축된 서양식 건물이었다.
마루노우치(丸の内)에는 이미 오피스빌딩이 늘어서있었다.
지진이 일어날 줄은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스미다가와(隅田川) 주변의 밀집지역이다. 목조건물 지붕들이 빽빽히 들어서있다.
이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1923년9월1일(토) 정오직전 무더위가 남아있는 도쿄.
많은 집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기압의 영향으로 때때로 강한 남풍이 불고 있었다.

그 논문발표로부터 이미 18년. 이마무라는 조교수인 채로 그날을 연구실에서 맞았다.
그리고 운명의 11시58분.
이마무라 "11시58분 진동을 확인."
처음에는 작은 흔들림이었다. 그러나 그후 상상을 초월하는 흔들림이었다.

"둘다 무사한가?" "무사합니다."
"속히 지진계를 확인하라!" "네"
"이쪽은 전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지진계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시, 좋다. 진원을 도출해낼 수 있겠나?" "어떻게든 될것같습니다."

"진원방향은?" "여기서부터 남서쪽 215도 방향"
"거리는?" "96km입니다."
"진원은 사가미만(相模湾)" "관동전역에 피해가 파급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급히 분석결과를 일본정부에 보고하라." "네"

"다시 흔들릴지 모른다. 다시한번 계측기를 준비해놓자. 서둘러."
이마무라의 지진계가 포착한 거대지진의 극심한 흔들림의 기록이다.
파형의 상하폭이 흔들임의 크기를 나타내고 있다.
가로축이 계속시간이다. 파형을 잘보면 진폭이 같은 채로 나오는데,
흔들림이 너무커서 바늘이 한계였던 것이다.
이것을 볼 때 강한 흔들림이 10분이상 계속되었던 것을 알수있다.



(기후, 岐阜 지방 기상대) 게다가 기후에 설치됐던 이마무라의 지진계도
흔들림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 파형에는 흔들림이 장시간 계속된 이유가 기록돼있었다.
처음의 흔들림, 즉 본진의 다음으로 이어지는 두개의 흔들림, 여진이었다.
본진의 3분뒤 및 4분반 뒤에, 둘다 M7급이었다.
이 여진이 흔들림을 오래 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진학으로는 그이상의 지진의 특징을 파형으로부터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후 90년. 관동대지진을 일으킨 지진의 메카니즘에 최신과학으로 달려드는 지진학자가
있다. 도쿄대학 고우케츠 가즈키(纐纈一起)교수다.
"다음 관동대지진이 반드시 있을테니까, 대비하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1923년
관동대지진을 자세히 조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것에 근거해서 다음번 관동지진이 어떤 지진일지 어느정도 예상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우케츠교수는 흔들림의 전모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뿐 아니라, 해외에도 단서를 찾았다.
프랑스 동부지역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도쿄에서 약1만km 떨어진 이곳에도 관동대지진의 흔들림이 전해졌었다.
스트라스부르대학 지진관측소
이곳에 관동대지진의 파형이 지금도 소중히 보관돼있다.
일본에서 지진발생 12분후, 몸에 느끼지 않는 극히 약한 흔들림이 포착돼있었다.

스트라스부르대학 루이스 리베라교수 "진원까지의 거리를 계산해서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났음을 금새 알았을 것이다.
파형의 진폭을 보고 매우 큰 지진이었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조사결과, 파형의 기록은 세계각지에 남아있는 것을 알게 됐다.
고우케츠교수는 전세계에서 파형을 모아서 관측점마다 진원으로부터의 거리나
흔들림의 강도를 해석했다. 그리고 도쿄의 파형과 대조했다.
그 결과 지하 어디가 어떻게 미끄러져서 흔들렸는지, 진원역 전체의 모습을 알게 됐다.



진원역은 사가미만(相模湾). 지하에 길이 130km에 걸쳐있었다.
그곳은 일본열도 지하에 있는 두 판의 경계에 해당한다.
관동지방 지하에는 남쪽에서 필리핀해판이 파고든다.
그 위에 육지판이 얹혀있다.

판경계에 변형이 쌓여 한계에 달해, 단번에 미끄러지면서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관동대지진은 지구의 지각변동이 일으킨 판경계형지진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도시에 극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전세계 데이타로부터 밝혀진 진원역의 움직임이다.
처음에 판경계가 미끄러진 것은 가나가와(神奈川)현 서부 지하 12km였다.
붉은색이 특히 강한 흔들림이 생긴 곳이다.
판경계의 미끄러짐은 약50초 걸려서 서에서 동으로 움직여갔다.



이번 해석을 통해,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관동각지의 흔들림 실태가 드러났다.
가장 흔들림이 심했던 것으로 보이는 곳은 가마쿠라(鎌倉).
진원역의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해있다.

도대체 어떤 흔들림이었는가. 이번에 드러난 파형을 토대로 실험했다.
90년 세월을 지나 현대과학으로 비로소 재현된 관동대지진의 흔들림이다.
지진발생 18초후 심한 흔들림이 덮친다.
일단 가라앉은 줄 알았더니, 또다시 강한 흔들림..
흔들림 세기는 진도7. 고베대지진에 필적하는 심한 흔들림이 가마쿠라를 덮친 것이다.

흔들림이 심했던 것을 나타내는 피해모습이 영상에 남아있었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 등 역사적인 신사, 불당이 붕괴.
121톤이나 되는 대불상이 30cm 앞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관동대지진의 진도분포다.
진도7은 가나가와를 중심으로 도쿄, 사이타마(埼玉), 치바(千葉) 등에 퍼져있었다.
진도7의 곳을 붉은색으로 표시한다.
고베대지진과 비교하면 그 면적이 20배 가까이 된다는 것을 알게됐다.

먼바다에서 일어나는 수가 많은 판경계형지진.
그것이 도시직하에서 일어남으로써 엄청난 피해가 초래된 것이다.
고우케츠교수 "그야말로 직하형지진인 고베대지진과 같은 흔들림이 일어났다.
그게 실은 매우 넓은 면적에서 일어났다는 상태.
앞으로 닥칠 관동지진은 직하형 판경계지진이 될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마무라 아키쓰네가 남긴 귀중한 기록과 현대 과학자의 탐구.
그것이 장차 일어날 지진의 리스크를 드러냈다.

이마무라가 남긴 것은 지진의 파형기록만이 아니었다.
관동대지진의 피해에 대한 보고서 총6권. 1,800페이지에 달하는 기록이다.
사망 밒 실종자는 10만5천명. 그 90%는 화재로 사망했다.
그 피해실태를 이마무라 등은 낱낱이 조사햇던 것이다.

지진발생 6시간후, 대학에 잇던 이마무라는 피해의 크기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이마무라 "한시바삐 피해상황을 알아야겠다. 경찰에 아직 연락되지 않는가?"
"안됩니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마무라 "거리를 보고오겠다.. 왜그래?"
"선생님, 지금 밖에 나가면 안됩니다. 도쿄는 큰일났습니다."
옥상에 올라간 이마무라가 본 광경.. 그것은
이마무라 "불타고 있다. 도쿄가 불타고 있다.. 지금까지 뭣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대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즉시 논문을 철회해라.
도쿄는 괴멸상태가 될 것이다.)
이마무라가 18년전에 예측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지진발생 3일후, 이마무라 등은 연일 피해지역을 돌았다.
이마무라 "이런 참상이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난다고 알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그러나 이걸로 지진한테 졌다고는 생각하고싶지 않다.
지금 우리가 할수있는 일은 이 현실을 기록에 남기는 일이다.
장래에 반드시 그 기록이 방재에 도움될 것이다.
대지진과의 싸움은 이제 시작된 것이다."

이마무라 등이 남긴 보고서. 그속에 화재의 실태가 상세히 기록돼있다.
이것은 어디서 불이나서 어떻게 펴졌는지 기록한 지도다.
붉은점이 지진직후에 불난곳. 화살표는 불이 퍼지는 모습이다.
당시 도쿄시내에서는 화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 불난곳은 134곳에 달했다.

칸다(神田)지역에서는 반경 200m 범위에서 10곳이나 불이났다.
그곳을 찍은 영상이 있었다.
지진발생 약1시간후, 대량의 연기가 시내전체를 덮을듯이 나오고 있었다.



왜 화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가.
이마무라 등이 남긴 기록과 영상을 대조분석해서 그것을 밝히려는 시도가 있다.
도시방재 전문으로 화재에 밝은 사이타마대학 니시다 유키오(西田幸夫)교수.
니시다교수는 영상에서 사람들이 피난하지도않고 화재를 바라보고있는 것에 주목했다.
니시다교수 "화재의 연소속도라는 것은 사람이 걷는속도보다 느리니까
불을 피하기만 하면 괜찮다는 생각으로 있었다고 보인다."

이마무라 등의 기록을 토대로 화재가 퍼지는 모습을 재현한 지도다.
지진 3시간후, 강한 바람으로 화재는 급속히 퍼졌다.
화재가 확대된 장소중의 하나로 아사쿠사(浅草)의 영상이 남아있다.
그때는 이미 사람들이 화재를 보고있을 여유가 없어졌다.
옮길수있는 데까지 가재도구를 꺼내서 피난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많은 사람들의 피난행렬이 현성된다. 큰길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꼼짝못할 지경이 됐었다는 것을 알게됐다.

"군중이 피난할 때 앞길에 화재가 나면 피난방향이 한정되는데 그래도
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오면 피난도 못하고 사망하는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각지의 광장이란 곳마다 모조리 사람들로 메꿔졌다.
그중에 위기에 처한 광장이 있었다. 그곳은 3방향으로부터 불이 다가왔다.
대지진 전의 광장 영상이다. 도쿄돔 1.5배 넓이에 4만명이 와있었다.
지진직후 그 광장에 피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몇시간후, 그곳에서 3만8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관동대지진의 희생자 3분의1에 해당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광장에 피난했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소녀가 있었다.
이치가와 후미코(市川ふみ子)씨 97세. 당시 7살이었다.
이치가와씨 "넓은 강가였다. 거기에 모두 피난했다."
광장에서 300m 거리에 살던 이치가와씨. 화재가 다가오자, 부모와 조모,
3형제와 함께 광장으로 향했다.

점차 주변 화재현장으로부터 불꽃이 날아오게 됐다.
그리고 작게 회오리치는 검은 바람이 다가왔다고 한다.
이치가와씨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웅~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 교차로 저편에서
시커먼 연기가 (회오리치면서) 광장속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진 당시의 상황이다.
불, 연기를 포함한 회오리바람이 사람이나 가재도구를 날려버리는 모습이다.
화재선풍(火災旋風)이라는 현상이다.

큰 화재가 일어나면 강한 상승기류가 생긴다. 거기에 옆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불꽃을 감싸듯이 바람이 흐르고, 부딪치는 곳에서 회오리가 생긴다.
이것이 점차 커지면서 토네이도같은 회오리바람이 발생한다.
이 화재선풍이 광장을 몇번씩 덮쳐서 그 일대가 불바다로 변한 것이다.

이치가와씨 "다들 불탈 때 회오리바람에 날려버렸다. 그러다가 밑에 떨어진
사람도 있고, 그대로 어디론가 날려간 사람도 있었다.
'사람살려'라고 외치면서, 불타면서 저쪽으로 날려간다.
여러명 봤다. 그런 것을.. 어제일처럼 생각난다. 무섭다."
이치가와씨도 가족과 함께 화재선풍이 날려졌다. 정신을 들었을 때
물웅덩이 속에 있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모와 3형제를 잃었다.



이 광장에서 사망한 3만8천명의 시체는 그자리에서 화장됐다.
이치가와씨 "우리집도 4명 사망해서, 뼈를 챙겨오려고 했는데,
많은 뼈 속에서 자기집 사람의 뼈를 알수없었다.
그래서 뼈는 포기하고, 집이 불탄 자리에 그릇조각이 있어서 챙겼다.
그래서 묘에 뼈는 없이 그릇조각만 넣었다."

화재선풍에 의해 피해가 확대되어, 도쿄는 시가지 40% 이상이 소실됐다.
이마무라 등의 보고서에는, 대지진에 의한 화재가 모든 방향에서 닥쳤다고
경고했다. (화재가 거의 동시에 여러방향에서 일어난다.)
그 교훈을 토대로 지진에 대한 대비를 재검토하여 다음세대에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니시다교수는 생각한다.
니시다교수 "(재해가 나면) 지금 시대에도 정보가 한정되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한다기보다, 화재가 닥치는걸 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이마무라 등의 보고서는 매우 귀중한데,
영상과 지도를 대조함으로써 피난상황 등을 객관적으로 알아내서 그것을
확실하게 다음세대에 남겨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발견된 영상에는 사상초유의 재해 속에서 사람들이 애써 살아가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도쿄에서 소실되지 않은 몇안되는 병원들. 밀려오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우에노(上野)공원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동상에는 수많은 벽보가
붙여졌다. 흩어진 가족에게 필사적으로 안부를 전하려고 한 것이다.

각지에서 단수되어 심각한 물부족에 빠졌다. 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적은 물을 서로 나눴다. 피난소에서는 지진직후부터 식사가 제공됐다.
피해지역에 의연금을 모으는 어린이들. 교토에서 촬영된 영상이다.

일본국내에 그치지 않고, 해외에서도 의연금이 모여져 그 금액의 현재의 가치로
1,800억엔에 달했다. 그런 도움에 힘입어, 괴멸된 지역이 부흥으로 향했다.
불탄 자리에 급속히 진전되는 건설공사. 사람들이 다시 생활을 되찾으려고
움직인 것이다.



그로부터 90년. 일본의 수도는 거대지진을 겪지않고 번영해왔다.
그사이 도쿄인구는 약4배로 증가했다. 그에 따라 주택지가 교외로 확대되고
전쟁뒤 일본의 발전은 도쿄에 집중돼왔다.

만일 지금다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 어떤 피해가 날 것인가.
지자체 예상이나, 전문가 분석을 토대로 M8급 판경계형지진이 일어난 경우를
시뮬레이션했다. 최대진도7의 극심한 흔들림이 수도권을 덮친다.

특히 심각한 피해가 나는 곳은 매립지다. 액상화가 발생한다.
이것은 액상화 발생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나타낸 지도다.
90년간 10배로 넓어진 매립지를 조준사격하는듯한 피해가 예상된다.
90년전에는 없었던 인공조성된 대규모 주택지가 광범위하게 붕괴될 우려가 있다.



그물처럼 뻗은 도로가 파괴되고 낙차가 생겨, 통행불가되는 곳이 60곳이상.
도시의 도로망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내진, 내화가 진전됐지만 건물피해도 적지않다.
흔들림이 가장 강한 가나가와에서만 전손되는 건물이 41만채.
전체 건물의 20%에 달한다.

화재발생은 약1,400건에 달한다고 예측된다.
또다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 90년전에는 생각할수도 없었던 피해가
광범위하게 야기될 가능성이 떠올랐다.
고도로 도시화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리스크에 처해져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번에 관동을 덮칠 지진은 언제 일어날 것인가.
이마무라는 그 단서도 남겼다.
관동대지진 뒤에 지진을 예측하기 위해서 이마무라가 주목한 것은
땅에 남겨진 지진의 흔적이다. 진원역 위에서 크게 땅이 융기했다.
이마무라는 그 융기가 지진 때마다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다음번 지진의 예측에 도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마무라의 생각은 현대의 과학자에게 계승되어 조사가 이어지고 있다.
산업기술종합연구소 시시쿠라 마사노부(宍倉正展)씨.
시시쿠라씨 "단구(段丘)가 있는 것이 보이죠.
실제로 우리가 하고있는 조사수법은 기본적인 부분이 이미 90년전에
이마무라선생에 의해 행해졌었다.
단을 하나하나 조사함으로써 과거에 융기한 역사를 알수있다."

해안선에 있는 깎여진 바위. 관동대지진 때에 융기한 것이다.
이곳은 진원역의 바로위에 위치한다. 지하에서 판이 미끄러지면
진원역 바로위에서는 땅이 튀어오른다. 이때 해안선의 땅이 융기되는 것이다.

관동대지진으로 융기된 바위보다 위쪽에도 또하나의 단차가 있었다.
지질조사에 의해 그것은 300년전의 지진으로 융기된 것이라 밝혀졌다.



보소(房総)반도에는 지진으로 융기한 흔적이 더욱 많이 남아있다.
관동 직하에서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융기가 되풀이됐던 것이다.
발견된 것만으로도 거대지진은 과거 16회.
지질조사로 각각의 지진연대를 알게됐다. 그결과 판경계형지진이 일어나는
가장 짧은 간격이 200년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발생한 것은 90년전의 관동대지진. 앞으로 100년간은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됐었다.

그러나 최근 보소반도의 다른곳에서 이루어진 조사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않은
연대의 융기가 발견됐다. 시시쿠라씨는 지금까지 알고있던 지진 간격이
실제와는 다를 가능성도 있는 게 아니냐며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시시쿠라씨 "수백년, 수천년이라는 역사속에서는 실은 더 다양하게 여러종류의
지진이 일어났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을 최근 알기 시작했다.
관동지진은 어쩌면 금방 닥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관동직하 판경계에서 지진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우려를 하는
과학자가 또 있다. 교토대학 니시무라 다쿠야(西村卓也)준교수다.
GPS를 써서 땅의 움직임을 mm 단위로 포착하는 조사를 하고있다.

이것은 GPS가 포착한 관동지방 땅의 움직임이다.
가나가와현 남부 및 보소반도에서는 연간 최대3cm씩 북북서로 이동하고 있다.
관동지방 밑으로 파고드는 필리핀해판도 연간 3cm씩 이동하고 있다.
필리핀판에 밀려서 땅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때 판경계에는 변형이 쌓인다. 그것이 한계에 달하면 지진이 발생한다.
변형이 해방된다.

니시무라교수는 GPS를 해석해서 어디에 변형이 쌓여있는지 계산했다.
그러자 오렌지색 부분에서 특히 변형이 쌓여있는 것을 알게 됐다.
니시무라교수 "보소반도 서쪽인데 1923년 관동대지진 진원역이었던 곳이다.
그와 더불어 보소반도 동쪽에서도 거의 같은 속도로 변형이 쌓이고있다.

현재 어느정도의 변형이 쌓여있는가. 판경계 전체적으로 보자.
이곳에서는 300년전의 지진(1713년)으로 거의모든 변형이 해방됐다고 보고있다.
그후에 변형이 연간3cm씩 쌓이고있다면, 100년에 3m, 200년뒤에는 6m에 달한다.
그때 관동대지진이 발생해서 판경계 서쪽 변형은 해방됐다고 생각된다.
한편 동쪽에서는 변형이 해방되지 않은채 쌓이기만 하고있다.
현재 변형이 9m에 달했다고 생각된다. 관동대지진 당시를 훨씬 넘은 것이다.

니시무라교수 "변형이 쌓인 영역이 보소반도 앞바다에 꽤 넓은데
그 면적으로 계산하면 M8급 지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잠재력이
보소 앞바다에 있다."
300년간 변형이 쌓이기만 하고있는 판경계 동쪽..
다음번 관동을 덮치는 거대지진은 이곳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니시무라교수는 생각하고 있다.

니시무라교수 "진원역에서 도쿄도심까지 거리가 짧아서, 우리가 여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흔들림이 덮칠 것도 생각되며, 지진직후에 곧바로 쓰나미가
닥칠 것도 생각된다."

이만한 대도시에서 판경계를 직하에 두고있는 곳은 달리 없다.
관동대지진으로부터 90년. 우리는 반복해서 거대지진이 덮치는 곳에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대도시를 구축해온 것이다.



관동대지진을 기록하고 튼 교훈을 남긴 이마무라 아키쓰네.
그후 교수가 되어 거대지진 예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시민에게 지진재해 예방을 호소했다.
이마무라의 육성이 남아있다. "지진은 사람의 힘으로 억누를 수 없지만
지진재해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 남녀노소 힘닿는 데까지
지진재해를 되도록 경감시키는 일에 용감하게 나서야 한다."

관동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가나가와현 오다와라(小田原)시.
90년전 그날 역에 정차해있던 열차가 산사태에 떠밀려 바다에 빠졌다.
차량 두칸만을 남긴채 열차는 바다에 가라앉아, 200명이상 희생됐다.
해저에 뻗어있는 금속막대. 가라앉은 열차의 부품이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네모난 돌은 역의 승강장 홈의 일부다.
발밑에 있는 관동대지진의 흔적. 아직 우리가 모르는 귀중한 교훈이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다.

과거의 거대지진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에 이어진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