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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6일 목요일

미국에서 시민이 원전을 폐로로 몰아붙인 내막을 강연


미국에서 시민이 원전을 폐로로 몰아붙인 이유
당사자가 캘리포니아주 원전을 둘러싼 공방을 증언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를 계기로 탈원전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모든 원전을
폐로하기로 결정한 독일만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전이 입지하는
미국에서도 원전이 잇따라 폐로에 내몰리는 사태가 되고있다.

얼마전 캘리포니아주에서 샌 오노프리(San Onofre)원전을 폐로로 몰아붙인
활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주민대표와, 후쿠시마 원전사고당시 미국 NRC
위원장을 지냈던 인물이 방일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시작된 탈원전
움직임과 시민에 의한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도쿄에서 강연했다.


←샌디에고포럼(San Diego Forum) 시민측 대표로,
주택도시계획건축가 도건 존슨(Torgen Johnson)씨
샌 오노프리원전을 폐로로 몰아붙였다




'후쿠시마원전사고가 미국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9월23일 강연회
(주최는 원자력자료정보실)에서 강연한 것은 샌디에고포럼 시민측 대표로,
주택도시계획건축가 도건 존슨(Torgen Johnson)씨와 전직 NRC위원장
그레고리 야스코(Gregory Jaczko)씨다.

일본과 비슷한 미국의 원전을 둘러싼 구도

존슨씨는 2011년3월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캘리포니아주에서
최대규모 원전의 폐로를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2년뒤인 2013년6월4일에는
야스코씨와 일본의 칸 전수상 등을 초빙하여
'후쿠시마:캘리포니아로 현재진행중인 교훈'이라는 강연회를 개최했다.
그 사흘뒤 샌 오노프리원전을 폐로한다고 전력회사 Southern California Edison사가
결정했다. 현재 폐로를 위한 작업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폐로에 내몰린 샌 오노프리원전 2호기 및 3호기(각 출력108만kW, 가압수형경수로)
운전을 정지한 것은 2012년이었다. 2012년1월에 3호기에서 미쓰비시중공업제
증기발생기에서 방사능누출이 발견된 것이 계기였다. 다만 존슨씨에 의하면,
"증기발생기의 불량은 폐로를 향한 최후의 일격이었으며, 가동정지는 캘리포니아
주민이 원전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된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부터
주민에 의한 끈질긴 운동이 원전을 폐로에 몰아붙인 원동력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원전과 입지 지자체의 관계는 일본과 비슷한 모양이다. 존슨씨에 의하면
고용확보를 이유로 입지 지자체가 원전을 유지하려고 하는 구도는 미국에서도 존재하며,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시점에서는 "선거로 뽑힌 사람들은 원전문제에 전혀 관계하고
싶지않다는 자세였다."고 말한다.

또한 후쿠시마 사고이전으 정보는 많은 부분이 전력회사로부터 제공된 것이며,
"원전은 청정하고 안전하며 신뢰성이 높고, 비용도 매우 싸다는 낙관적인 정보투성이였다."
"전력회사 홍보부문 책임자가 지역의 개발계획을 담당하는 행정조직 책임자를 맡고 있거나,
현지 상공회의소, NGO나 환경단체에까지 기부를 하고있던 것도 나중에 드러났다."고도
존슨씨는 말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그런 지역사회의 모습에 근본적인 전환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원전사고로부터 2주밖에 안된 사이에 8,800km나 떨어진 존슨씨 동네에서 팔리던 우유에서도
방사성물질이 검출됐다. 존슨씨가 나서게 된 계기였다.
"3명의 어린 자녀를 둔 부모로서, 아내와 나는 일본에서 벌어지는 원전재해의 실정과,
우리집에서 48km밖에 안되는 샌 오노프리원전의 안전성을 조사했다."

존슨씨네는 원전의 입지상황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주의 쓰나미의 역사나 활단층에
대해서도 공부를 더해갔다. 그로부터 많은 것을 알게 됐다. 2개의 원자로가 해안에 너무
가깝게 설치돼있는 것과, 활단층 사이에 끼어있다는 것, 반경80km권내에 740만명이나
사람들이 살고있는 것을 알게됐다.

만일의 경우에는 막대한 피해금액, 내부관계자도 중대증언


그리고 반경48km권내의 도시에서 주택가격을 통해 시민그룹멤버들이 계산했더니,
주택가격은 4,355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금액은 미국의 프라이스-
앤더슨법(Price–Anderson Nuclear Industries Indemnity Act)이 규정하는 원전사고시의
배상 상한액 1265억달러와 비교해서 그 30배를 훨씬 넘는 것이므로, 만일 원전이
대사고를 일으키면 주민이 거액의 재산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샌 오노프리원전의 위험성이 인식되는 가운데, 내부에 정통한 관계자도 증언을 시작했다.
원전노동자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우려하기 시작했으며, 샌 오노프리원전의 격납용기를
설계한 수석엔지니어가 "격납용기는 입지조건에 견딜만한 설계가 아니다. 40년수명이 되면
바로 폐로해야 한다. 20년 연장가동은 인정돼선 안된다."라고 현지 시의회에서 발언했다.

"샌 오노프리원전과 관련한 심각한 사태가 널리 주민에게 알려지게 됐다."(존슨씨)고 한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후쿠시마 원전사고후에 피난해온 2 가족에 의한 시의회 발언도
의원들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존슨씨 등 주민의 운동에 의해 LA시를 포함한 현지 지자체 의회가 잇따라 재가동에 반대를
표명했다. 연방상원 환경공공사업위원회에서도 주민을 지지하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존슨씨에 이어 강연한 야스코씨는 NRC위원장으로서 원자력규제행정의 책임자를 지낸
인물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3월17일에 주일 미국대사관은 주일 미국인에게
후쿠시마 제1원전으로부터 80km권밖으로 피난할 것을 권고했는데, 그때 데이타를 분석해서
조언한 것이 야스코씨가 이끄는 NRC였다.


←시민에 의한 행동의 중요성을 호소하는
그레고리 야스코 전직NRC위원장






그 야스코씨의 눈에,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어떻게 비쳤는가. 또한 어디에 문제가
있었다고 야스코씨는 보고있었는가.

야스코씨는 일련의 사고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로서 "피난계획이 극히 취약했다."
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1979년에 일어난 스리마일섬 원전사고의 교훈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 그 중요한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16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던 고향을 떠나야만 했으며,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라고 야스코씨는 힘주어 말했다.
야스코씨는 2012년8월에 원전사고의 피난지시구역을 방문해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피난주민들의 체험담을 들었다.

야스코씨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원전의 안전성은 극히 취약했다."고 한다.
후쿠시마 사고후에 NRC는 태스크포스를 설치하면서 안전시스템의 취약성을 밝혀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알게 된 것이 "외적인 사고나 재해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던
것이었다."고 야스코씨는 말했다. 야스코씨는 작은 지진에조차 대비가 없었던
원전의 실태를 그 예로 들었다.

시민의 행동이 원자력행정을 바꾼다

야스코씨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보고, "새로운 원자력의 안전에 관한 기준을
다시세워야 한다."고 결심했는데, 대담한 규제강화에 반대하는 여타 NRC위원과의
대립이 심해져서 위원장직을 사임하게 됐다. 2012년5월이었다.

"새로운 기준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교훈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어떠한 사고이건
단 한사람이라도 피난하게 되는 사람이 나오는 사태에 빠뜨려서는 안되며,
원전부지밖이나 바다가 오염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일본의 비극으로부터 배울
기회를 살려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에너지정책, 안전기준을 실시해야할 필요가 있다."
고 야스코씨는 힘주어 말했다.

게다가 야스코씨는 시민에 의한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시민이 행동해야 한다. 시민 여러분은 정치가를 움직이도록 할 책임을 지고있다.
그리고 존슨씨가 (캘리포니아 주민운동으로)보인 것은, 곧바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끝)


2013년 9월 2일 월요일

[미국 시리즈 기사]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4




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4. 후유증을 안고 살다

덩치큰 흑인 해군 한명이 벌거벗은 채로 갑판밑에 줄쳐놓은 구역안에 서있었다.
그는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그는 계속 중얼거렸다, '아내가 선물해준 부츠만은 제발..'
그러나 담당자들은 그의 모든 것을 벗기고, 그의 몸을 문질러 씻도록 했다."
미 해군 신예항모 Ronald Reagan호의 항해사 Maurice Enis가 당시를 회상했다.

"담당자들은 그에게 아예 연마제를 줬다. 그건 선체를 문질러닦는 것으로
모래종이 같은 것이었다.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전신을 씻었다.
그리고 다시 가이거카운터로 온몸을 체크당했다. 그는 가이거카운터가
반응하지 않을 때까지 반복해서 씻어야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차례가 됐다."


지진과 거대쓰나미가 덮친 일본의 북부연안에서 대규모 수색과 구조활동을 전개한
도모다치작전은, 암울한 국면을 맞이했다.

복합적인 재해가 약2만명의 사망자를 냈고, 연안의 사회기반을 파괴했다.
일본어로 친구를 뜻하는 도모다치작전은, 일본정부 요청으로 시작되어,
미 국무성과 국방성에 의해 짜여졌고, 80일간 전개된 작전이었다.

국방성은 이 작전에 일본국내 63개 미군기지를 모두 참여시켰고, 해군과 해병대 5,500명이 
탑승한 항모 Ronald Reagan호, 순양함 Chancellorsville호와 4척의 구축함 Preble, McCampbell, Curtis Wilbur, McCain, 그리고 몇척의 보조함선으로 편성된 기동함대도 

그러나 순식간에 구조작전은 위험하고 지도에도 없는 길로 들어섰다.
지진이 후쿠시마 제1원전 원자로중의 1호기를 파괴했고, 쓰나미가 1호기부터 4호기까지
안전시스템의 모든 전력을 절딴냈다.
작전 지휘부에는 이번엔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NRC)와 에너지성도 참여하게 됐다.

1호기부터 3호기의 핵연료는 빠르게 멜트다운되었다.
4호기의 핵연료는 사용후연료수조에 들어가있었는데, 그 위치는 원자로에 넣기편하게
건물 윗쪽에 있었다. 그런데 3월15일 폭발이 원자로건물 지붕과 벽을 날려버려,
방사성물질이 대기중에 분출됐다.

각 원자로건물에서 냉각수를 순환시킬 전력이 상실되었고, 일본측은 당장 무슨수라도
써야했다. 그들은 미군으로부터 고압펌프차를 빌어서, 건물내에 물을 퍼부었다.
물은 사용후연료수조나, 원자로, 건물바닥으로 쏟아져서, 결국엔 바다로 흘러나갔다.
그와중에도 도쿄전력과 일본정부는 방사능재난을 최소화해 보이려했다.
도쿄전력은 방사능누출은 거의없다고 발표했다. 실제로는 매우 높은 양의 방사능누출이 
있었고, 통제불능 상태였다.

일본국내에는 약7만명의 미국정부관계자, 군관계자와 그 가족이 살고있으며, 그들은 모두 
피난해야할지 우려했다. 후쿠시마로부터 300km 남쪽 요코스카 해군기지에서는 검출되는 
방사선량 증가에 따라, 가족들이 피난했다.
요코스카 기지를 위협할만큼의 방사선량이라면, 후쿠시마 사고원전의 원자로들이 이미
절딴났다고 NRC관료들이 유추했고, 아무리 일본측이 둘러댔어도, 미국관료들은 일본측이 
정직하지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다만, 최우선 과제는 지상에 체재하는 미국 관계자들의 안전이었고, 도모다치작전 종사자에 
대해선 간과되었다. 그 순간에도 해군은 후쿠시마 해안에서 3km 거리에 머무르며, 
헬기를 왕래시켜가며, 생존자를 수색하고, 구원물자를 공급하고 있었다.
바다에 있던 미국인들은 그들의 임무를 수행중이었던 것이다.


  Maurice Enis

조타수 Enis가 방사능오염되어, 줄을 서게 되다니,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조타수의 중요한 임무가 2가지 있다. 

하나는 물론 배의 조종이고, 또하나는 후속 함선에게 기함으로부터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신호기를 돛대에 게양하는 일이다.

어느날 Enis는 2주일동안 돛대에 게양돼있던 성조기를 내리고, 함장실에 보관하라고 명령받았다.
"나는 국기를 내리고, 잘 접어서 오른팔로 안고갔다. 그리고
제자리에 보관했다. 별다른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저녁식사후, Enis가 센서앞을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경보가 울렸다." 
Enis가 회상했다. "그들은 일제히 내게 소리쳤다. '아무것도, 누구도 만지지마라!
그대로 오염처리구역으로 직행해라!'라고.."

줄쳐놓은 오염처리구역 앞에는 체크를 기다리는 남녀가 줄서있었다.
Enis는 기다릴 필요없이, 알려져 있어서, 맨앞으로 불려나갔다. 
이미 알몸이 된 병사가, 한장의 타올로 앞을 가린채, 서있었고, 사관과 상급군의관이 
전시회 그림을 보듯 구석구석 훑어보는 곳이었다. 그들이 Enis도 불렀다.

"얼마전까지도 배에 방사선이 없다고 들었다." Enis가 말했다.
"그들이 배안에 오염처리구역을 설치할 때도, 왜그러는지 설명은 없었다."
"그들은 먼저 내 부츠를 체크했는데, 아무일 없었다.
다음에 내손을 검사했는데, 센서가 미쳐버렸다.
검사하던 사람이 펄쩍 물러나면서, 외쳤다. '그에게서 물러나라!'"

"그 다음 순서는 나도 알고있었다. 내팔은 비닐봉지로 감싸졌고, 모두들 내게서 멀어지라고 했다. 마치 전염병 환자처럼 취급당해서, 나는 신경발작을 일으킬 뻔했다.
그들은 나를 만지지 않았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내가 어디로 가서 뭘해야 하는지, 명령했다. 나는 꺼끌꺼끌한 페인트 제거제로 내손과 오른쪽 몸을 문질러야 했는데, 피부가 두겹은 벗겨졌다.

Enis에게서 얼마나 방사선량이 검출됐는지, 그때나 그뒤에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승무원 중에서 최대수준의 방사선량이었다고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당시 Enis가 제일 걱정한 것은 피폭선량 자체가 아니었다.
그를 신경쓰이게 한건, 알지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였다.

사관들이 그를 보며, 큰소리로 명령을 해댔다.
남녀 동료들은 오염처리구역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말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정말 난처했었다." Enis가 말했다.
알몸이 된 채, 사관들에게 야단을 들으면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몸을 씻어야 했는데, 무슨 일인지 내게 말도 없어서, 나는 무서웠다. 
그들의 태도를 볼때, 내가 진짜 곤경에 처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승무원들을 두렵게 한 것이다."

"우리중의 누구도 방사선 전문가가 아니었다.
나는 죽어버리는 걸까?
나는 암에 걸리는걸까?
아니면 배에서 내려야하게 될까?
내 피부가 부풀어오르거나, 뭔일이 날지, 알수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알수없었다."


해군은 방사성물질이 비눗물로 씻겨지는 줄 믿고있었다.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맞다.
가장 약한 종류인 알파선을 내는 방사성물질은, 표면이 매끄러운 경우에 씻어낼 수 있다.
그보다 강한 베타선을 내는 방사성물질도, 피부에 상처가 있거나 해서
그로부터 들어가지 않는한, 씻어낼 수 있다.
그러나 해군이 쓰는 페인트제거용 연마제는 피부 표층을 벗겨냈다.
한편 항모 Reagan호 비행갑판은, 플라스틱이나 유리같은 매끄러운 소재가 아니다. 
단순히 문지른다고 해서, 그런 다공질물질에서 방사성물질을 씻어낼 수 없다.

Reagan호 승무원들은 먼바다에는 방사능오염이 없는 줄 알았고, 
항해사 Enis도 방사능구름이 진짜 구름처럼 그 모양을 피해갈 수 있는 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드러난 것은, 그 방사능구름이 도처에 있어서,
웬만해선 회피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400m 길이 갑판에서는 또다른 종류의 경보가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디지털 손목시계를 하고있었다." 조타수 Jaime Plym이 말했다.
"그 시계가 별안간 서버렸다. 누가 마침 방사능 때매 그럴수 있다고 했는데, 
그때 갑판에 있던 대여섯명이 확인했더니, 디지털 시계가 모두 서버린 것이다. 
그중에 매우 비싼 것도 하나 있었는데,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처음에 웃었다. 그러나 점점 웃지 못하게 됐다.
더이상 웃기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쳐다볼 뿐이었다."


  Jennifer Micke

갑판밑에서 일하는 병사들은 그런 정보도 모르고 있었다.
Jennifer Micke에 따르면, 제트기 정비사들은 귀환한 기체로부터 거의 모든 부품을 떼어내서 방사선량을 측정해야했다.
거대한 격납고 엘리베이터는 사용이 제한돼있었다.

"해치감시원을 두게 됐다." Micke가 회상했다.
"비행대원 중의 한명이 의자에 앉아서, 아무도 갑판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갑판출입은 정면출입구만 쓰도록 제한됐다. 
더이상 함내가 오염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루종일 지키고 앉아서, 잘못된 길로가는 사람들에게 야단쳤다."

Micke는 비행갑판의 제트기가 방사능오염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비행갑판에서 내려올 때마다, 신었던 부츠를 씻는 담당자가 있었고, 
씻은 부츠를 한데 모아서 가져갔다. 그래서 비행갑판에 나갈때는
부츠 위에 부츠를 덧신었다가, 돌아오면 겉의 부츠를 내놔야 했다."

"또한 생물학전용, 화학전용, 방사선용 방호복을 착용해야했다. 
마스크와 산소통까지 착용하도록 지적됐었는데,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이들 조치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항모는 복잡한 산업지구같은데, 언제든지 설비의 크고작은 부분이 망가진다. 
정상적인 마모 때문이거나 사고 때문이기도 하다.
도모다치작전 수행중, 헝겊조각을 문틈에 끼워서 방사성물질을 막으려던 시도는, 
여러가지 문제때매 효과가 줄어버렸다. 망가진 문짝과 망가진 문틀도 있었고, 
어떤 곳은 방수문을 떼어다가 수리중이었다. 
설계상으로 항모 Ronald Reagan호는 격리구간의 연속이었지만,
실제로는 공기가 얼마든지 들락거리는데, 지하묘지의 통로보단 낫다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고

미 해군의 공식적 입장은 장병들에게 방사능오염은 거의없었다는 것이다. 
국방성은 도모다치 의료기록부를 약2년에 걸쳐 만들었는데, 
일본에서의 재해중에 다양한 수준의 방사능에 노출되었던 약7만명의 미군관계자 및 가족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기록부는 2012년12월에 완성됐다. 한달뒤, 국방성은 전신 및 갑상선의 최대피폭량을 
검토한 결과, 더 조사를 필요로 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고 결론내렸다.
피폭으로 인한 증상패턴이 나타나는지, 장기간에 걸쳐 추적할 수있는,
유일하게 역학적으로 타당한 수단으로서 기록이 계속될 수가 없게 됐다.

7만명의 피폭 미국인의 의학적인 문제를 정확히 기록하려는 입장에서 볼때,
그 기록부가 첫단계부터 결함이 있었던 사실은 간과되었다.
해군은 각개인을 철저히 진단해서, 그들의 건강상태의 정확한 기준선을 만드는 일을 하지않았다. 그대신, 기록부는 그들 모두의 최신 건강상태를 섞어놓은 것이었다.

실제로, 결국 각개인에게 실제 건강상태에 의한 기준선이 무엇인지 알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 기준이 없으므로, 미국 재향군인회의 의사들은 종양이나, 천식, 피부나 체내의 낭포 등의 증상이 방사선 피폭 때문인지, 아니면 도모다치작전 참가전부터 문제가 있던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개인의 기준이 없으니, 작전에 참가한 남녀다수에게 공통된 증상이 있다는 기록이라도 있지않는한, 퇴역군인들에게, 그들의 건강문제가 방사선피폭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할 기회는 거의 없는 것이다. 

  Ed Lyman

당시 일본에 있던 미국인들이 거의 안전했다고 결론내린 것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Ed Lyman은 말한다.
참여과학자연맹의 핵물리학자인 그는, 핵안전기술자 Dave Lochbaum과, 퓨리처수상 저널리스트 Susan Stranahan과 함께 멜트다운에 관한 책을 집필했었다.
미국정부와 독립연구자들이 모두 후쿠노빌의 오염물질량을 산출하려 했다는 것이다.

"공통결론은, 최악일 정도는 아니었다." Ed Lyman이 말했다.
"그 단기간내에 누구든 심각한 피폭량이 될수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피폭량은 단지 후쿠시마에 매우 가까운 곳에서는, 널리 알려진, 지속적인 건강유지에 손상을 유발할만한 수준을 약간 넘는 것이었다.

"다만, 나는 데이타를 수집하는 것을 늘 찬성한다. 대개의 경우에 방사선으로 발암증세가 나타나기까지는 5년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항상 더많은 데이타를 모을수록, 더 좋다."


  Arnie Gundersen

다른 전문가들은 더 회의적이다.

"나는 처음부터 도모다치 의료기록부를 믿지않았다." 
원전기술자이며, 방사성물질 확산관련 전문가 Arnie Gundersen은 이렇게 말했다.
"Utah 사막에서 원폭으로 병사들을 생체실험했을 때, 생존자에 관해 국방성이 작성한 의료기록부는 엉터리였다. 
병사들의 실제 피폭선량은 국방성의 숫자보다 훨씬 컸다."

"국방성이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고, 그 피해를 최소화했던 역사를 아는 나로서는, 최신 발표에 대해서도 신뢰따위 갖을수없다."

Gundersen은 도모다치 의료기록부를 계속하지 않는 점에 대해,
"실망했지만, 놀랍지는 않다"고 했다. "Ronald Reagan호 승무원들은 국방성측이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피폭된 것이 분명하다. 많은 승무원들에게 공통 증상이 나타나고있어, 그것을 집단 히스테리 따위로 치부할 수 없다."

"계산되지 않은 큰 문제 중의 하나가 희가스이다. 희가스가 항모를
덮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달라붙지는 않았지만, 갑판을 씻어내는 등으로 
나와있던 사람들이 흡입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나쁜 조짐이었다.
160km나 떨어진 먼바다에서, 방사성입자를 들이마실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놈의 방사성입자를 들이마셔서 어떠냐고? 그들의 폐는, 
항모의 갑판이나, 바다처럼 마찬가지로 똥으로 오염된 셈이다.
국방성은 병사들의 폐속에 들어간 방사성입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HCzuPm4T4qo
(Fukushima Radioactive Aerosol Dispersion)


결국 도모다치작전에 참가한 당사자들이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뜻밖의 피해

"내 건강은 작년초부터 나빠졌다."
Reagan호의 F18 기체정비사이며, 위험물취급책임자 Micke가 말했다.
"2012년3월30일 나는 California에서 명령변경을 받기위해 대열에 서있었는데, 
처음으로 의식을 잃었다."

"단순한 탈수증세일거라 해서, 의무실에 앉아 물 한병을 마셨다. 
그러나 4월29일 또다시 쓰러져, 이번에는 응급실에 옮겨졌다.
나는 두통을 호소했는데, 사람들은 '아마 머리를 부딪혔겠지'라고 말하며, 
CT스캔을 했다. 그러자 뇌에서 종양이 발견됐다고 해서, 
그뒤로 2번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해군을 제대하게 되었다."

전문적으로는, 의사가 Micke의 전두엽에서 발견한 것은 
희돌기 성상세포종(Oligoastrocytomas) 2기였다. 
그것은 악성으로 난치성 암이며, 뇌의 언어중추 영역에 생긴다.
수술로 암을 제거하면, 빈자리가 때로 함몰되어, 문제되는 수가 있다.

2012년가을에 두번째 수술후, Micke는 "현재로서는 암세포 활성이 없다"고 들었다.
암을 남겨둔 부분이 있는데, 그대로 가만히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암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아서,
최악의 상태는 아니다."

"나는 두달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지만,
분명히 살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생활은 지금, Wisconsin주 Thorp시의 부모의 목장에 돌아와서, 
암 재발에 대비하는 것이 되어있다.
"현재 나는 여러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해서, 주5일 일하는 것을 비롯해서 뭐든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나는 차도 없고, 내가 어디를 가든 부모가 태워줘야 한다."

Micke는 예측할 수 없는 병을 안고 사는 것에 스스로 익숙해지도록 했다.
"내 미래계힉은 심하게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여전히 대학에 갈 생각이 있고, 좋은 직업을 갖고, 삶을 이어갈 계획이다."
암에 대해서는 앞으로 그냥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잘 대처해가려 한다."

"오늘을 열심히 살고, 나자신을 잃지 않고, 최대한 인생을 즐겨야겠다."

  Jennifer Micke

그녀는 동전을 고소한 원고인단의 한명이다.
후쿠시마 사고원전 원자로의 상태와, 방사능누출의 실태에 관해, 미국정부를 오도한 것으로, 결국 그녀의 건강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소송을 하는 것은 단지,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한다." 그녀가 설명했다.
"사태를 은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사람들의 인생을 망친다. 
이런 일이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것을 보기싫다."

"해군에 관해서는, 그 상황에서 더 할수있는 게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리 훈련된 것도 아니었다. 제한된 정보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함께 일했던 동료들, 내가 지냈던 장소들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처음에 쓰러지고, 진단받을 당시에,
아직 해군소속이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그녀의 치료비는 해군에서 해결됐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질 여지가 있다.
"의사들은 내 병이 군복무와 관련됐는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Micke가 말했다.

국방성이 방사선으로 인해 장병들에게 어떤 질병도 발생하지 않을거라고 미리 결론내리고, 도모다치 의료기록부를 중단해버려서, (건강문제의 패턴을 추적할 유일한 역학적 수단이었을텐데도) Micke는 난치성 암환자이면서도 치료를 못받는 퇴역해군이 될지도 모른다.

빨리 늙는다

Michael Sebourn은 해군 비행기 정비사로 근무한 17년간, 온갖 부품을 다뤄왔다.
그가 근무한 아쓰기(厚木) 기지의 헬기들은 오래된 거라서, 안전과 최대의 성능을 위해
부품을 교환했다.

그러나 도모다치작전 중에는 헬기 부품, 특히 라디에이터와 에어덕트를
비행후에 매번 교환해야했다. 대량의 방사성물질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라디에이터를 다시 쓸수는 없었다." Sebourn이 말했다.
"교환해야했다. 그것들을 비눗물 속에 넣고, 그통을 경찰통제선처럼 격리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방사선이 나오는지 매일 측정했다."

"비눗물통이 방사선을 뿜고있었다. 몇년이고 방사성물질이 붕괴되면서
방사선이 나올것이다. 우리는 입었던 Tyvek(듀퐁제 부직포) 방호복도
벗어서 조각내서, 통에 담았다. 표시된 거나, 더러운 거, 온갖것이
방사능오염된 거라서, 폐기통에 넣어야했다.
폐기통에 많이 넣을수록, 방사선 방출도 많아서, 마치 먹이를 주는듯했다."

2011년봄의 난리였던 80일간, Sebourn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2011년5월에 그의 8살난 아들 Kai가 이상하게 아팠다.

"아들이 구토발작을 계속해서, 3주나 학교를 쉬었다." Sebourn이 말했다.
"학교규칙에, 한번만 토해도 집에 보내는데, 아들은 하루에 10번~15번
구토를 했다. 특별한 느낌은 없는데, 구토가 멈추지않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의사들은 스트레스성이라고 진단했다.
아직도 증상은 계속되는데, 원인을 못찾고 있다."

그러나 Sebourn 자신은 건강했다. 2012년이 되기까지는..

  Michael Sebourn

"2012년3월 나는 해군 군의관들이 설명못하는 증상이 생겼다." Sebourn이 말했다.
"오른쪽 몸의 능력이 평소의 40~50%로 떨어진 것이다.
나는 MRI를 두번, X레이 및 초음파 검사를 받았는데, 어떻게 된건지 밝혀내지 못했다."

"팔, 가슴, 어깨에 통증이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 왼쪽몸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원래 오른손잡이라, 오른쪽을 쓰는 일이 많은데, 이상한 일이다."

그와 아들 Kai도 유전자 상담이나 검사는 받지않았다.
17년간 해군근무한 Sebourn은, 퇴역후에도 5년간은 의료비 기타를 해군이 부담하는데, 그뒤에는 100% 자기부담이 된다.
"본인은 퇴역후 얼마간 해군이 돌봐주지만, 가족에겐 그런 권리도 없다."

그 5년이 지나버리면 어떻게 되나?
"그거 훌륭한 질문이군." Sebourn이 말했다.
마치 단번에 노화된듯이, Sebourn의 오른쪽 몸은 계속 쇠약해지고있다.

"나는 도모다치 의료기록부가 7만명의 군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인줄 알았다.
그리고 10년후, 15년후에라도 건강문제가 생기면, 작전과 관련된 만큼,
우리는 치료대상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국방성은 마지막 순간에 의료기록부를 봉인해버려서,
우리가 뭔일을 당할지 알수없게 돼버렸다."

Sebourn이 동전을 고소하는 원고인단에 함께한 이유의 일부는,
피해를 일으킨 것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과, 장차 필요해질 의료에 대한
보상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해군에 대해 화가나지는 않았다. 그들도 어떤 상황인지 몰랐고,
처음겪는 일이었다. 해군은 우리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해군은 할수있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 모두가 암흑속을 날았던 것이다.

관료체제 속의 항해

항모 Ronald Reagan호가 이끄는 제7함대 기동부대는, 도모다치작전이 끝나자,
잽싸게 일본을 떠났다. 항해사 Plym과 Enis는 안도했다.
이제 끝났다. 그리고 방사선검사팀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내부피폭에 관해서는 검사도 안했다." Plym이 말했다.
"그들은 센서로 몸을 겉으로 훑었을 뿐이었다. 혈액검사나, 다른 검사도 없었다."

"우리는 80일간 거기에 있었다." Enis가 말했다.
"그리고 임무가 끝나갈 때, 나는 턱밑에 작은 혹이 생긴걸 알았다.
검사를 받을 수 있는지 가봤더니, 담당자는 이미 배를 떠났다."

"그뒤, 나는 악성 위궤양에 시달렸고, 2개더 혹이 생겼다.
하나는 허벅지밑에, 또하나는 두눈 사이였다."

Reagan호는 Peugeot Sound(Washington주)를 향하고, 거기서 1년간 오염제거와
전면적인 분해점검을 하게됐다.
해군에 4년계약이었던 Enis는 Washington주 Bremerton에 있는 Olympic College에
등록했다. 거기서 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5년계약인 Plym의 퇴역을 기다리기로 했다.

"해군생활중에 꼭 하던 소리가" Enis가 회상했다.
"퇴역하면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맘껏 기르겠다는 얘기였다.
해군에 있는 동안엔 늘 수염과 머리를 깎아야 하니까."

"그래서 퇴역한뒤 나는 머리를 기르고, 수염도 냅뒀다. 그런데,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요즘엔 빗질을 거의 안한다. 빗으면 빗에 머리가 한뭉치씩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씨쓸 때, 오른손이 떨리는 것도 알게됐다."

  Enis & Plym at Olympic College

Enis는 185cm 키의 덩치큰 운동선수로, Olympic College의 미식축구팀에서 MVP였다.
그의 400m 주파시간은 올림픽 예선기록과 2초차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를 버틸 체력조차 찾기 힘들다.

"나는 아직 25살이다." 그가 말했다. "그런데 몸이 아작나버렸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애써서 몸을 만들어왔는데, 이제는 몸속 스위치가 줄줄이 꺼지는 느낌이다. 노인이 된 기분이다. 이런건 싫다."
"방사선이 뭔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이건 내가 한게 아니다."

Enis는 해군측에서 그의 의료기록이 "없다"고 들었다.
현재 그의 문제와 Reagan호에서의 임무와의 인과관계를 추적할 길이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치료비는 해군이 부담하지 않을 것이다.

  Jaime Plym

Plym에게는 처음에 문제가 신경쓰이는 것이었다.
"내 생리주기가 6개월간 완전히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의사들은 내게 수억번이나 임신검사를 했다. 그밖에는 왜그런지 원인을 찾지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임신한게 아니었다."

"그리고 6개월후에 너무 심한 생리가 와서, 대량의 출혈을 하고 응급실에 갔는데, 의식을 잃었다."
그것은 의학적인 설명이 안되는, 반복되는 현상이었다.
정상적인 생리기간이, 이제는 급격하게 통제못할 출혈현상으로 돌변해서, 병원에서 대처해야하게 돼버린 것이다.

2012년3월에는 천식도 생겨서, 2012년12월에 해군을 퇴역하기까지 6번의 발작을 일으켰다.

해군은 Plym에게 발생한 부인과증상이 해군근무와 관계된다고 생각하지 않고있다.
도모다치작전 참가로 야기된 건강문제는 없다고 국방성이 결정했기 때문에,
방사성물질을 흡입함으로써 Plym의 폐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도 부정되었다.
결국 그녀도 지금, 건강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Enis & Plym – Hudson Riverside Park

그들 전직 항해사는 지금, Florida주 Jacksonville에서 St. Johns River State College에 다니며, the University of North Florida에 편입하길 바라고 있다.
두명 모두, 해군에서의 좋은 추억을 갖고있다.

"내 한쪽에서는 해군이 장병을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믿고 싶다." 그녀가 말했다.
"그당시 우리가 얻은 정보는 거의 없었다는 걸 기억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후쿠시마 사고원전에 위험이 없다, 방사능누출은 안됐고, 원전은 통제하에 있다고 했던 것이다."
"거짓말한 것은 일본인이다. 나는 그들에게 책임을 추궁한다."

그러나 Enis는 복잡한 입장이다.
"일본인이 미국정부에 거짓말했다." 그가 말했다.
"내 한쪽에서는 해군이 장병을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해군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를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내 또한쪽에서는, 아니 해군이 그랬다고 말한다."
(끝)

◇◇◇◇◇◇◇◇◇

세줄씩 내용요약 :

방사능에 오염된 병사는 온몸을 연마제로 벗겨냈다.
구원활동이었던 작전은, 순식간에 위험한 길로 급커브틀었다.
요코스카에 경보가 울린 그날, 미국은 일본이 뻥친걸 확신했다.

Enis는 깃발 한번 만졌다가, 방사능오염 최고기록을 세웠다.
후쿠시마 앞바다건 먼바다건, 방사능구름이 널려있었다.
미 해군은 그속에서 피해다니고 있는 줄로 착각했다.

갑판에서는 전자시계가 죽으면서, 주인에게 방사선의 위험을 알렸다.
정비사들은 부츠를 한번신고 내던지는 나날이었다.
의료기록부는 개인의 건강상태를 실제로 기록한 게 아니었다.

Arnie Gundersen은 국방성의 예전 짓거리 때매 아예 믿을 수없댄다.
그는 희가스를 장병들이 들이마신 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Jennifer는 뇌종양으로 두번 수술하고, 요양중에 원고인이 됐다.

↓노르웨이 기상청 2011.5.9~13 제논133 시뮬레이션

Michael은 정비사인 탓에 방사능오염된 헬기부품을 허구헌날 만졌다.
그의 아들 Kai는 계속 토하는데, 학교다니기도 어렵다.
Michael은 오른쪽 몸이 노화되고, 왼쪽 몸이 커지고 있다(?).

운동능력이 자랑이던 Enis는 하루를 지낼 기운도 없고, 노화됐다.
Plym은 매달 대량출혈로 응급실에 실려가야하고, 천식이 생겼다.
Plym은 일본인을 추궁하는데, Enis는 한편으로 미군도 마찬가지라고 느낀다.

이것으로, "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시리즈 Part1 ~ 4까지 모두 마쳤다.
Roger Witherspoon의 블로그에서 더이상의 글은 이어지지 않는 듯하다.

[미국 시리즈 기사]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3


2013.3.3 Energy Matters(Blog) by Roger Witherspoon(Journalist)
A Lasting Legacy of the Fukushima Rescue Mission:
Part 3: Cat and Mouse with a Nuclear Ghost


(2013.3.5 Huffington Post에도 게재)

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3. 핵의 망령과 술래잡기


며칠 동안, 절딴난 후쿠시마 사고원전에서 불던 바람이, 방사능구름에 얽힌 미신과 맞부딪쳤다. 그 미신은 원자력산업계와 그 감시견, 원자력규제위원회(the 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NRC)가 함께 지어낸, 가장 끈질긴 뻥이다. 그것은 2가지 모순되는 전제를 지니고있다.

1. 절딴난 원자로나 핵연료수조가 뿜어낸 방사성 가스는 한덩어리로 꽉뭉쳐서 날아가니까,
    오염이 확산되지 않는다.
2. 16km 거리에서 방사능구름은 주전자의 김처럼 흩어지니까, 검출되지 않거나,
    기준이하로밖에 안남는다.

"꽉뭉치는 것"과 "김처럼 흩어지는 것"의 모순이 오랫동안 문제시되지 않았었다.
대놓고 미신이 언급된 게, 2002년4월8일 New York주 White Plains시의 공청회에서였다.
그 공청회는 Manhattan에서 약50km 북쪽에 있는 Entergy Corp.의 Indian Point원전과 관련한 피난계획을 다루는 자리였다.

Entergy Corp.의 Larry Gottlieb가 "방사능구름을 피하는 가장쉬운 방법은, 길건너편으로 가는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총을 겨누면, 당신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몸을 피해야 한다.
그러면 된다." 그에 대해, NRC관료들은 전혀 이의를 달지 않았다.


Projected Fukushima Plume-2011.3.11

2011년3월11일부터 미쳐버린 일주일 동안, 일본동북해안을 지진과 쓰나미가 덮쳐서
약2만명의 사망자, 실종자를 내고, 온갖것을
파괴해버렸고, 후쿠시마 제1원전 원자로
6개중 4개가 돌이킬수없게 절딴났는데,
그때 일본에 있던 미 국방성, 국무성,
에너지성, 그리고 NRC 관료들은, 모두가
그 미신에 얽메여서, 방사능구름이
바다로만 날아가는 사이에, 상황을
수습가능할 것으로 믿었다.

그것은 국방성에게 가장 중요했다.
일본내에 63개 기지가 있고, 6만명의 남녀 및
그 가족이 있다. 그래서, 항모 Ronald Reagan호가 3월13일에 후쿠시마 사고원전으로부터 약200km 앞바다에서, 갑판센서로 방사성물질을 검출했을 때, 오히려 안심했다.


Projected Fukushima Plume-2011.3.12

NRC상황보고서에 따르면,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 벤트 시점과 동시에 측정가능한 양의 방사성물질이 있었다.
해군도 방사능구름에서 공기시료를 채취했는데, 방사성물질이 검출됐다.
Reagan호는 후쿠시마 사고원전에서 방출된 방사성요오드, 세슘, 그리고 테크네튬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분석됐다."

그당시 다행인 줄 알았던 것은, 후쿠시마 사고원전 원자로가 동전의 통제하에 있었고, 방사능오염이 멜트다운 때문이 아니라, 원자로건물내에 충만한 가스를 계획적으로 벤트한 결과라는 것이었다. 방사능구름이 뭉쳐서 바다쪽으로만 불고있는 한, 모든 미군기지나, 도쿄일대 수천만주민이 파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후쿠시마 사고원전 1호기의 멜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쓰나미가 덮치고 모든 예비전원이 사용불가되기 전이었다.
녹아내린 핵연료는 압력용기와 격납용기의 바닥을 차례로 뚫고, 격납용기 하부에 있던
냉각수 속에 들어가고, 그때문에 발생한 방사성물질을 포함한 가스가, 파손된 원자로건물로부터 밖으로 새어나왔던 것이다.

2013년 1월까지 분석되지 않았던 모니터링 설비에서, 벤트보다 적어도 1시간전에
이미 평소의 700배에 달하는 방사선을 검출했던 것이 확인됐다.
NRC측은 Reagan호가 계획적 벤트에 의한 방사능구름을 검출한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벤트가 원인이라면, 방사능구름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을텐데 말이다.
그대신 함대는 NRC가 예측못한 방사능구름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Radiation Spread from Fukushima-2011.3.12~24

동전이 미국측에 전달하지 않은 것, 그리고 미국측이 긴박한 상황에서 간과한 것,
그것은 벤트따위가 애초부터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차이는," 원자력 기술자 Arnie Gundersen이 말했다.
"체르노빌에선 폭발로 방사성물질이 하늘높이 치촛아, 그때문에 광범위하게 퍼져버렸다.
후쿠시마에선 폭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벤트를 했으나, 공업용 팬을 돌릴만한 전력도 없어서 작동되지 않았다."
"그때문에 후쿠시마에선 방사성물질이 스모그처럼, 기본적으로 땅을 훎으며 흘러갔다.
그중 약80%가 바다쪽으로 흘러갔다."

방사능구름이 흩어져 없어진다는 것도 미신이었다.
Reagan호와 함정들은 줄곧 뭉친 방사능구름을 피하려했는데, 실제로는 퍼져있는 방사능구름이 계속 그들의 머리위에 존재했고, 늘어나는 방사능오염이 그들을 에워쌌다.

후쿠시마 사고원전 1~4호기 건물이 절딴난 뒤, 3월16일까지 Kurt Campbell 동아시아태평양담당 국무찬관보와 NRC 및 국방성 관료들은, 도쿄전력의 정보에만 의지하고 스스로 나서지않는 일본정부에 대해, 점점 화가났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Campbell에게 제출된 국무성 내부보고서를 입수했는데,
"그당시 국무성 관료들 사이에선 일본정부에 대해 'FUBAR'로 표현했다.
'Fucked Up Beyond All Recognition'의 약자로,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
이라는 의미다."
http://ajw.asahi.com/article/0311disaster/fukushima/AJ201302060007
(역주:아사히신문 '프로메테우스의 덫' 영어판 기사 링크. 한글판은 ↓
http://asahikorean.com/article/newclear_disaster/AJ201301090075 )
그 보고서는 Hillary Clinton 국무장관에게도 전해졌다.

NRC도 육지의 오염을 막아야 한다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방사능구름이 바다로 빠져나간다고 예상했다가, 후쿠시마 사고원전으로부터 290km남쪽 요코스카 해군기지에서 방사능오염이 검출되어, 당황하고 있었다.
육지의 수천만 일본인과 수만명 미국인들을 걱정하는 사이에, 도모다치작전으로 수색과 구조황동을 수행중인 Reagan호와 함정들이 있던 바다로 날아간 방사능오염의 영향에 대해서는 간과해버렸다.

난리통에 그런 실수는 이해할만했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UCS의 핵기술자 D. Lochbaum은 말했다.
"막연히 바다보다는 육지에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만 했을 것이다.
풍향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바다로 불도록 하고, 안심했을 것이다."
"해군이 있던 자리에서는 피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와중에도 해군은 도모다치작전을 수행중이었다.

핵 알아맞추기 게임

군대에서는 필요한 정보가 상부에 모이고, 필요한 만큼씩 쪼개진 정보가 하부에 전달된다.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위기가 닥칠 때에도, 장병들은 별로 아는게 없는 상태였다.
일본연안에서 수색 및 구조활동을 하던 Reagan호와 함정들에게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은 분명했다. 항해사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야만 했다.

  Jaime Plym

"육지에서 방사능누출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항해사  Jaime Plym이 말했다. "당연히 해안으로도 갈 것이었다. 당시 함정은 헬기를 발착시키느라, 해안에서 3km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항해사인 우리에게, 본국은 당시 뭔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리려 했다." Maurice Enis가 덧붙였다.
"그러나 그들은 겁주거나, 패닉을 유발하는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사능 누출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로를 결정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디가 위험한지, 방사능구름은 어디까지 있는지, 추측해야했다. 우리는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함교에 설치된 센서들이 울렸고,
헬기 조종사들이 대기중의 방사선량을 측정하고 있었다.

방사능구름을 피하기 위해, 기동함대 제독과 각 함장들은 항해사들에게, 일단
후쿠시마 사고원전의 정확한 위치를 잡으라 명했다. 항해사들은 후쿠노빌로부터 'T'자를 그렸다 . 즉, 후쿠시마 사고원전으로부터 바다로 곧장 80km 직선을 긋고, 남북으로 40km씩 직선을 그었다. 그것들을 연결한 삼각형이 방사능구름을 포함하는 제한된 범위라고 가정했다.

"그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했다." Plym은 말했다.
"우리는 그 삼각지대를 피해야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구원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우리는 몇번씩 방사능구름을 뚫고가야 했다.
우리는 매번 삼각지대를 우회해서 다닐만큼의 시간여유가 없었다."

"물자공급을 위해서 해안에 다가갈 때는, 그야말로 방사능구름 지역이었다.
그곳은 해안에서 3km 거리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렸던 삼각지대의 바깥에 있다가도, 그 삼각지대로 뚫고가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삼각지대뿐만이 아니었다. 수시로 헬기나 제트기 조종사들이 귀환하면서,
각지역의 오염 데이타를 보였는데, 보이지않는 위협으로부터, 피해다녀야했다.

"우리는 앞바다쪽에 약80일간 머물렀다." Enis가 말했다.
"그사이 우리는 필요에 따라 연안에 접근했다가, 다시 앞바다로 퇴각하곤했다.
그것은 바람이 어느쪽으로 부는가에 따라 술래잡기하는 듯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방사능구름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수없었다."

"그러다가 일본측이 방사능누출이 없다고 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실제로 방사선을
검출한 순간,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뒤로 우리는 경계태세를 하고,
늘 방독면을 휴대하게 되었다."
명확한 정보가 없고, 일본측을 믿을수없는 상황에서, 배안엔 소문과 공포가 만연해갔다.

NRC 상황실의 전화회의 의사록에는, 이때 항모 Reagan호 함장은 1시간마다 방사선량을
측정하고, 재일미국대사관에 보고하도록 명령받았다.
선체는 방사성 세슘, 요오드, 테크네튬 및 그밖의 온갖 핵분열산물로 오염돼버렸다.
국방성은 더이상 일본정부와 동전이 전하는 정보를 믿지 않았다.

Enis와 Plym 같은 항해사들에게는 조종사들이 모아온 데이타 중에서 필요한 정보가 주어졌다.
"우리는 실제로 방사성물질의 존재가 확인된 장소를 기입한 해도를 봤다." Enis가 말했다.
"그것을 모조리 피해서 항로를 정한다는 것은 골치아픈 일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얼마나 방사성물질이 떠다니는지, 완전히 알 수가 없었다.
그와중에도 동전은 우리에게, 우려할 일은 없다고 했다."

"항해사들만치 알려진 것도 없는 병사들에겐 입소문만이 무성해졌다."
헬기나 제트기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면, 방호복을 입은 요원들이 비눗물로
기체를 문질러 닦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효과적인지는 몰랐다.

"나는 그모든 시간동안 악화되어갔다." Plym이 말했다.
"뭔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따지기 보다도, '집어치우고, 집에 간다'고 하고싶어도,
그럴 수없는 게 문제였다. 좀비가 된 뒤에, 'OK 이제부터 나는 씻을테니까, 다 해결이다'
라고 할것인가. 우리는 거기에 있는 동안 내내 공포에 질렸다."

"우리중 누구도 방사선에 관해서 지식이 없었다. 이러다가 여러개의 팔이 생겨날지도 모른다든지, 그런 황당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디지털 손목시계를 만들때, 방사성물질을 쓴다는 얘기나, 우리 모두 암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했다. 우리는 정말 알수 없었다.
우리는 공포에 떨다가, 다시 억누르고, 그런 반복을 했다."

  Enis in Hazmat suit

어찌보면, 엄한 군기가 해군병사들을 공포속에서 버티게 했다.
"명령을 받으면, 그대로 한다." Enis가 말했다.
"선체에 물을 뿌리고 청소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고, 청소에 집중한다. 만일 지휘관이 방사성물질을 씻어내는 작업에 대해 잘못알고 있다면, 우리는 제자리를 맴돌수도 있다."

"그보다도 우리는 큰 차원에서 보람있는 일을 하고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모든 집들이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모두 죽었고, 어린 애들이 고립되어 있는데, 우리의 헬기가 먹을것을 가져다주면 얼마나 기뻐할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자신의 개인적 공포를 잊도록 한다."



Reagan호 갑판밑에 창문도 없는 곳에서 Jennifer Micke와 동료들은 F-18 제트기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일했다.
5,500명이 탑승하는 Reagan호는, 그녀가 자라난 조부모의 목장이 있는 Wisconsin주 Thorp시보다 5배는 컸다. 언젠가는 그 목장에서 멀지않은 곳에 그녀자신의 목장을 갖고싶어했다.

  Jennifer Micke

"고등학교 때, 우리는 Osh Kosh 비행기박물관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22살 제트기 정비사가 말했다.
"그때 나는 비행기에 빠졌다. 다만 공군이 재미있을 것같지않아서, 배에 타고자 해군을 선택했다."

그녀는 Thorp 고등하교 졸업반이던 2009년에 입대수속했고, 졸업후 18살에 해군 Great Lakes 훈련소에 갔다.

"신병훈련은 식은죽 먹기였다(Boot camp was terribly easy)."
부모의 거실에서 인터뷰에 응하며, 그녀는 말했다.
"내 일생일대의 경험이었다. 고교에서 나는 골프를 쳤고, 성적은 중간정도로, 평범한 학생이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전혀 관심없는 것들을 하나가뜩 가르치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해군에서 나는 반에서 톱이었다. 나는 반의 리더였다. 내가봐도 굉장했다.
해군에서는 내가 알고싶은 것들을 가르쳐줘서, 정말 즐거웠다. 금속제조과정과 날개모형을 배웠는데, 날개에 큰 구멍을 뚫고, 우리가 다시 수리해서 날수있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즐겼다. 소젖짜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항공기 정비사 교육을 마치고, San Diego로 날아가서 Reagan호에 합류했다. "Reagan호를 처음봤을 때, 더 클 줄알았는데, 도크에 있는 것을 보고, "저거야?"라고 물었다. 영화로 봤을 땐, 커보였던 것이다. 이만한 것에 비행기가 내려앉다니, 나는 충격이었다."

  Jennifer Micke

일반적으로는 400m 길이의 배에서 "같혀있다"는 느낌은 들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전에서는 모든게 달랐다.
Micke가 말했다.
"도모다치작전 당시, 우리는 갑판에 올라가는 것을 극히 제한당했다. 갑판에 고정된 항공기에 대해 필수적인 검사를 할때만 갑판에 나갔다. 아니면 입은것을 모두벗어서, 가이거카운터로 체크해야했다."

"나는 온갖 방호장비를 착용해야했던 것을 기억한다. 고무장갑, 고글, 그리고 앞치마까지. 마스크와 산소통까지 착용하도록 지적됐었는데,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제트기도 방사능으로 오염됐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비행기의 브레이크를 해제하고, 특별구역까지 이동시켜서, 방사선을 측정했다.
우리는 더이상 경보가 울리지 않고, 측정할 필요가 없을때까지,
온갖것을 반복해서 씻고 또 씻었다."

"패널 하나씩 떼어낼 때마다, 새것으로 교체하고, 떼어낸 것을 측정할 담당자에게 넘겼다.
방사선량이 기준치를 넘으면, 또다른 처리담당자를 불러야했다. 작업이 더욱 번거로워졌다."

"함내에 방사능오염이 퍼지지않게 하기위한 매뉴얼은 없었다.
방사성물질은 옷이나 신발에 묻고, 대기중에 떠다니면서 함내를 오염시켜,
선량계 경보가 울렸다."

"장병들은, 각자 대처했는데," Micke가 말했다.
"방사능오염을 차단하려고, 모든 문틈을 헝겊조각으로 막았다.
도처에 '헝겊을 치우지 말라'는 메시지가 써붙여졌다. 정말 희한한 광경이었다."

"나는 항상 겁이났다."

그 방법은 흥미로웠으나, 효과가 없었다.

함장이 있는 함교에서는 배가 오염된 것을 확실하게 알게됐다.
눈이 내린 날에 장병들이 눈싸움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센서가 울렸다.
눈이 대기중의 방사성입자를 묻혀서, 오염돼있었다. 그래서 바닷물을
퍼올려서 갑판을 고압세정했는데,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도쿄전력은 미군 상부에게, 전혀 방사능이 누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함전체가 오염돼버렸다. 우리는 모두 화학전용, 핵전쟁용, 생물학전용 방호복을
입어야했다. 그리고 대기도 오염된 것에 대비해서, 방독면도 착용해야했다."

"우리는 하루만에 물이 바닥났고, 샤워를 못하게 됐다. 우리는 물탱크에 있던 모든 물을
버려야했고, 탱크를 씻어내야했다. 그것도 오염되지않은 해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다."



함내 물공급 문제는 오염되지않은 해역에 가는 것에 달려있었다.

"우리는 함내의 탈염장치를 써서, 물을 만들고 있었다." Plym이 설명했다.
"함전체의 물이란 물은 모두 버려야했고,깨끗한 물을 얻을 떄까지 검사를 계속해야했다.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바다에서 물을 얻어야하는데, 바다가 오염돼있었다.
그리고 배안에서 물이란 온갖곳에 있는 것이다."

작전중인 항모을 씻어내는 일이란게, 쉬운게 아니다.
"함내를 상당부분 차단해야 한다." Enis가 말했다.
"그리고 각 구역마다 오염된 사람은 누구든 씻게 하고, 모든 도구와 온갖것을 씻어내야한다.
그리고는 깨끗한 구역으로 가려면, 3단계 체크를 통과해서 방사능오염되지 않았다고
확인된 사람만 갈수있다."

한편 항모의 출력도 제한돼버렸다. Reagan호의 원자로 냉각시스템에서, 터빈에 필수적인
깨끗한 물이 필요했다. 원자로의 깨끗해야할 부분이 오염돼버려서, 승무원들이 그곳에서
일할수 없게돼버린 것이다.

"결국 함내의 모든 오염이 해결될 때까지, 모든 물을 차단하고, 버려야했다." Enis가 말했다.
(Part.3 끝)

◇◇◇◇◇◇◇◇◇


세줄씩 내용요약 :

도쿄전력은 은폐했다.
워싱턴은 미신 때매 착각했다.
결국 해군만 불쌍하게 됐다.

국무성은 일본정부에 화가났다.
NRC도 육지걱정만 했다.
결국 해군 혼자서 퀴즈게임했다.


항해사는 삼각지대를 그려놓고도 들락거리면서 열받았다.
항해사도 아닌 병사들은 소문들 속에서 열받았다.
온갖 공포속에서, 군기 때매 움직였다.

Jennifer는 신병훈련이 식은죽 먹기였다.
눈싸움하다 방사능오염됐고, 바닷물로 씻다가 더 오염됐다.
배안의 모든 물이 쓸모없어졌다.





[미국 시리즈 기사]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2


2013.2.11 Energy Matters(Blog) by Roger Witherspoon(Journalist)
A Lasting Legacy of the Fukushima Rescue Mission:
Part 2 The Navy Life – Into the Abyss


(2013.2.12 Huffington Post에도 게재)

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2. 해군 생활이 나락으로


미국정부에게 도모다치작전은, 단지 또하나의 대규모 인도적 구원작전이었다.
당시 가장 가까운곳에 있던 해군함대와 많은 지상요원이, 곤경에 처한 우방을 돕고자
달려갔다. 당시 일본 동북해안은 거대지진과 거대쓰나미로 괴멸되어, 사회기반은 붕괴되고,
2만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

일본어로 친구를 뜻하는 말로 지어진 도모다치작전은, 처음에 대량의 물자보급부터 시작됐다.
육상과 항모 Ronald Reagan호의 항공기팀의 미군장병들에게도 단지 그런 활동으로 보였다.
워싱턴의 시각은 도모다치작전이 오랜 동맹관계를 더 긴밀하게 할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달라졌다.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 2호기, 3호기의 핵연료는 멜트다운되고, 그 과정에서 분출된
수소가스가 폭발을 일으켜, 일본전국에서 방사선량이 검출되게 됐다.
4호기에서는 폭발로 원자로건물 지붕이 날아가, 사용후연료수조가 노출됐다.
그 수조에는 1,500개의 연료봉 다발이 치명적인 세슘, 요오드, 플루토늄 등을 포함하고있다.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NRC) Gregory Jaczko 위원장이
소집한 회의 및 전화회의 의사록을 보면, 모순되는 데이타 앞에, 우려가 심해지는 상황을
나카내고 있었다. 해군이 현장에서 측정한 방사선량은 일본정부와 동전이 전했던 것과
현저히 달랐던 것이다.

NRC는 암흑속을 날고 있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여러개의 원자로가 멜트다운되는 일은
있을수없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긴급상황 모델도 어디까지나 사고난 원전에서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모든 중요 시스템이 정상기능한다는 것이었다.

Jaczko 위원장은 일본국내에 있던 미국인들에게, 침착하게 일본정부가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을 따르하라고 권고했다. NRC는 미국내 기자회견에서, 방사능낙진의 위험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의사록에는 다른 얘기가 있었다.


  Greg Jazcko

3월14일 Jaczko 위원장이 주제하던 전화회의가,
Jack Grobe가 가져온 나쁜 소식 때문에
중단됐다. Jack Grobe는 NRC 기술부 차장이었다.
Jack Grobe, "방해해서 죄송한데, 사태가 급박해지고있다.
현사태를 보고 떠오르는게.."
"진짜 문제인게, 풍향이 바뀌었다. 풍향이 바뀌어서,
북동쪽으로 불던것이 남서쪽으로 불고있다.
일본 육지쪽으로, 그리고 도쿄쪽으로다.
그리고 도쿄 남쪽에 있는 항구에 항공모함이 정박중이다.
후쿠시마에서 약280km 거리이고, 도쿄에서 16km인데,
거기서 측정된 방사선피폭량이 12시간동안 10~20mrem(=1.2~2.4mSv/d)에 달해,
갑상선의 경우 5배~10배.."

Jack Grobe, "280km 남서쪽으로 방사능구름이 갔다고 해도, 후쿠시마 사고원전의
방사성물질의 양이나 방출시기와 맞지 않는 것같다."
Mike Weber, "그렇다, 내가 얘기를 듣고 납득되지않는 게 바로 그거다."
Jack Grobe, "그러나, 항모 제독이 우리에게 전해온 숫자는, 여러 측정장치로 검증한 것이다..."
Mike Weber, "이럴수가.."
Jack Grobe, "그들은 원자력항모를 운영한다. 그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였다. 그들은 일본측이 제공하는 데이타를 믿을수 없었다.

이것은 도모다치작전에 참가한 미국인들에게는, 작전기간내내 스스로 알아서
대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두가지 필요에 대처해야 했는데,
폐허가 되고, 사회기반시설이 파괴된 곳에서, 수색과 구조를 수행하면서,
후쿠노빌이 방출하는, 보이지않는 오염으로부터 방어도 해야했다.

국방성과 국무성, NRC 관료들에게 도모다치작전은 성공적인, 단기간 실시된
인도적인 임무였다. 그것은 요청되었고, 기록되었고, 완료되었다.

그러나 지구반대편에서 명령을 수행한 사람들은, 작전의 성공이 남긴 결과와 함께
살아야 하게 되었다. 작전에 참가한 일부 장병들에게 도모다치작전은 경력도,
미 해군에서의 꿈도, 끝나는 것이었고, 다른 인생을 불안속에 살게 된 것이다.

마약중독자의 아들

Michael Sebourn은 아무도 원하지 않은 아이였다. 동네에서도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고,
그대로 가다간 장차 형무소에 들어가든지, 어디서 죽든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그가 미 해군을 만났다.

"내 어머니는 마약중독자고, 아버지는 내가 18개월때 딜러로부터 마약을 훔치려다가
살해당했다." Sebourn이 회고했다.
"우리는 South Carolina주 Charleston의 공영주택에 살고있었다.
계부가 나를 학대하고, 어머니가 번돈을 모두 마약과 술에 써버렸다.
나는 영양실조로, 체중이 모자랐다."

그는 5살때 조부모에게 맡겨졌는데, 2년후에 조부모가 사망했다.
그는 Indiana주 Gary에 사는 숙모에게 맡겨져, 낡은 시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백인 아이로 지냈다.

"나는 인생에서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못했다." Sebourn이 말했다.
"나는 가난해서, 대학따윈 꿈도 못꿨다. 고교졸업후 잠시 공장에서 일했지만
잘되지 않았고, 3개월간 부랑자 생활을 한 적도 있다.
트럭에서 생활하며, 월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잤다."

그는 다시 숙모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불량한 생활을 하고, 법을 어긴 적도 있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몰두할만한 일도 없고, 아무튼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내가 군입대하면 어떨지 숙모에게 상의하자, 숙모는 부엌으로 달려가,
차키를 꺼내오며, 'Let's go!'라고 했다. 이틀뒤 나는 입대했다."


  Michael Sebourn

Great Lakes 해군훈련소에서 그는 잘해냈다.
담당업무를 고를 때, 그는 행정을 선택했다.
"뭔가 제대로 작동된 것이다."
그는 1993년에 해군에 들어간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나는 긍지를 되찾았다. 나는 가치관을 얻었고, 성공하게
되었다. 해군근무하기로 한것은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처음으로 나의 집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게 가족이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가족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17년전 그는 일본으로 부임해서, 미사와(三沢)해군항공기지의
생활에 만족했고, 헬기부대 정비주임으로 승진도 했다.
그는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는 지구를 반바퀴 돌아, South Carolina 마약소굴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명실상부한 해군이었다.

운동선수와 음악가


Maurice Enis는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Minnesota주 Rochester 출신의 키큰 아이로,
그의 생활은 스포츠와 체력단련이 중심이었다.
"나는 Rochester Century 고교 육상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200m와 400m 달리기 선수로, 계속하고 싶었다."
"내 코치는 해군출신으로, 복무중에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그것은 매력적인 인생으로 보여서, 나도 해군에 들어갈 생각을 했다.
19살때, 나는 채용사무소에 가서, 입대하면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지 물어보고,
입대하기로 했다. 2007년이었는데, 집에서는 어머니가 많이 울었다.
9.11과 전쟁 때문에 내가 부상당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라고 말했다."


  Maurice Enis

"옳은 결단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나를 살렸다.
나는 목적없이 지냈는데, 해군은 내 시간과, 내가 무엇을
할수있고 성취할 수 있는지,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일단 임무에 들어가면, 딴생각을 할 시간따위 없다.
하루가 분단위로 돌아간다. 그러다 하루 24시간을 쉴 때,
나는 무엇을 우선할지 배운 덕분에, 그 시간을 적절하게 써서,
보다 많은 것을 성취할수있게 됐다."

"나는 해군에서 정말 성장했다. 해군에는 육상경기장이나
운동장이 없었으므로, 나는 항해사 및 조타수를 선택했다.
항해술에는 천체를 참고하는 전통적 방법과, 수학과 컴퓨터를 쓰는 새로운 방법이 있다.
모든 항해시스템의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해도에 적용하고, 위성을 이용하면서,
정확한 우리의 위치를 결정한다."

그는 또한 사랑에 빠졌다.


  Jaime Plym

Jaime Plym은, 눈내리는 곳과는 너무나 먼 곳 출신이다.
그녀는 Florida주 St. Augustine에서 자랐고, Jacksonville
대학을 2년간 다니며 음악을 전공했다.
베이스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나는 음악을 평생하고 싶었다. 그러나 직업으로 삼고싶지는
않아서, 대학을 중퇴하고 Gainesville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했다. 다시 대학에 돌아가려고 했으나, 내가 음악 장학금은
받았었지만, 다른 전공학과에 다닐 돈은 없었다.

목적을 잃은 그녀는 집에 돌아와 해변을 거닐면서 2007년이
저물도록 지냈다. 그녀에겐 해병대에 입대한 오빠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에게도 그런 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바다로 나가보고싶었다. 큰 배에 타고싶었던 것이다."

Plym과 Enis는 Great Lakes 훈련소에서 같은 반이 되었고, 나중에 같은 임무가 되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싶은지 열심히 생각했다. 조타수에 대해 배웠는데, 함교에서 일하며, 
항해전체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선택했다."


항해술은 항공모함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른 함종이라면, 항해사들은 바람과 해류를 확인하면서 최적 항로를 택하는 게
어렵지 않다. 위험이 닥쳤을 때, 예를들어 방사능구름이 천천히 다가올 경우에는,
특히 중요해진다.

항공모함의 항해사들은 그다지 여유가 없다.
길이 400m나 되는 갑판이 파도를 따라 오르락 내리락,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내내
최대한 조용한 해역을 찾아내서, 안정을 이루어야 한다.
항공기가 발진한 뒤에는 그곳에 머물러, 귀환시에 헤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바람과 해류를 따라 방사성물질이
다가올 경우, 항모는 피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훈련을 마치자마자, 남태평양에서 기동부대 기함인 항모 Ronald Reagan호의 조타수 및
항해사로 임무를 시작한 그들은, 자기들에게 그런 사태가 기다리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즐거운 일이 많았다." Plym은 말했다.
"우리는 처음엔 친구사이였고, 점차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2011년3월11일, 쓰나미가 일본 동북해안을 덮칠 때, Ronald Reagan호와 제7함대
항모기동부대는 한국 항구를 향하고 있었다.

"방향을 바꾸어, 일본에 구원활동을 가게 된 것을 곧바로 알게 됐다." Plym은 말했다.
"다음날 오전5시까지 우리는 현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해 몰랐다." Enis가 말했다.
"육지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인터넷이나 전화 등 외부접촉을 하지 않았었다.
우리는 단지 엄청난 위기가 발생했다는 것만 알고있었다. 본국으로부터 함장에게
현장에 방사능오염이 위험성이 있다고 전해오기까지, 원전에 관해 몰랐다.
그제서야 우리는 방사능누출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 : 방사선

도모다치작전은 주미일본대사관이 Kurt Campbell 동아시아·태평양담당 국무차관보에게
구원요청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Campbell은 곧바로 원자력규제위원회(the 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NRC)
Gregory Jaczko 위원장, Mike Mullen 합참의장 등과 협의했고, Mullen은
악화되는 일본상황에 관해, 계속 Barak Obama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구원활동으로 시작되었으나, 후쿠시마 제1원전의 6개 원자로 중의 하나, 1호기가
방사성물질을 방출하면서, 상황은 곤란해져갔다. 적어도 또다른 3개의 원자로가
절딴나버릴 위험이 있었고, 4호기 사용후연료수조에는 1,535개의 핵연료 다발이
담겨있었다.



3월12일 Ronald Reagan호와 제7함대 기동부대가 후쿠시마해안 3km앞에 도착했을 때,
후쿠시마 제1원전 원자로 1호기가 폭발했다. 3월14일에는 3호기가 폭발했고,
수소가스가 공통배관을 따라 4호기 원자로건물까지 터뜨려, 사용후연료수조가
노출된 상태가 돼버렸다.
3월15일에 2호기가 폭발했는데, 동전은 1,2,3호기의 핵연료가 멀쩡하다고 발표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핵연료는 녹아서 덩어리가 되어, 원자로 바닥에 흘러내렸다.

일본정부는 사태가 통제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았고, 자위대를 출동시키지도
않았다. 파괴된 4호기 사용후연료수조에 계속 물을 뿌려서, 핵연료 화재와 폭발을
막아야했는데 그것도 하지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 일간지 아사히신문은, 이때의 일본정부와 워싱턴에 있는 일본대사관 사이의
교신기록을 입수했다.
Mullen 합참의장은 후지사키 주미일본대사에게 전화해서, 원자로 냉각을 위해,
자위대를 출동시켜야 한다고 했다.
"미군은 4호기도 위험한 상태라고 판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원자로를 냉각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자위대 출동을 포함해서 말이다."
"미국은 원전사고에 대한 여러 대책이 마련돼있다. 대통령도 현재사태를 깊이 우려하고
있다,.."
http://ajw.asahi.com/article/0311disaster/fukushima/AJ201301280006
(역주:아사히신문 프로메테우스의 덫 영어판 기사 링크. 한글판은 ↓
http://asahikorean.com/article/feature_series/prometheus/AJ201301040096a )

NRC에서는 Jack Grobe가 위기대처팀을 이끌며, 24시간 상황실에서 Jaczko 위원장과
일본에 있는 팀과 계속 회의상태였다.
그들의 예전 시나리오, 즉 한 원전에서 여러개 원자로가 멜트다운되는 사태는
있을리 없다는 것과, 원자로 격납구조물이 방사성물질 확산을 막는다는 생각은,
폭발과 함께 틀렸다고 증명됐다. 그들의 시나리오가 일반시민을 방사능피폭으로부터
지켜준다는 것도 의문이 됐다.

NRC의 회의록에는, 4호기 폭발후, Grobe가 격분해서 말했다.
"원자로 격납구조물이 방사성물질 누출을 막을거란 얘기는 이제 쓸모없게 됐다."
"이것은 일종의 재난훈련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 다만, 모든게 최악으로 치닫고,
어디까지 갈지 상상도 못하는 상황의 경우다."



그러나 NRC가 매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견해는 달랐다.
일반시민에 대해, 위험이 닥칠 일은 없다고 한 것이다.

그와중에 바다에서 해군 함정속 장병들은 도모다치작전을 수행중이었다.
(Part.2 끝)

[미국 시리즈 기사]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1-번외편







[번외편]미국이 산출한 일본각지에서의 피폭선량

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1. 미 해군의 방사능오염
 ← 지난글 내용중에, 미국에서 작성된
"도모다치 의료기록(The Tomodachi Medical Registry)"에 관한 사이트 URL도 있었다.

Environmental Health Surveillance Registries
https://registry.csd.disa.mil/registryWeb/Registry/OperationTomodachi/DisplayAbout.do

URL의 사이트를 열고, 오른쪽 아래 "View Dose Estimates" 버튼을 클릭하든지,


윗부분의 "Dose Estimates" 탭을 선택하면, 맨위의 지도와 같은 상태가 된다.
이것은 국방성이 작성한 양방향 지도인데, 실제로 미군이 그당시 측정해서,
방사선량 데이타가 확보된 지역마다 서류모양의 아이콘이 표시돼있다.

알고싶은 지역의 아이콘을 고르고, 팝업창에서 연령대를 고른다. (Adult~어른, 등)
그러면 그 지역의 "도모다치 의료기록"이 실제로 표시되는데,
2011년월3월12일부터, 5월11일 사이 60일간에, 일본의 해당지역에 있었던 사람의
방사선 누적 피폭선량을 알려준다.

중간쯤에 2가지 데이타가 표시되는데, 전신과, 갑상선의 누적 피폭선량이다.
갑상선 피폭선량은 특히 방사성요오드의 영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하에 몇가지 데이타를 뽑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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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DOSE ESTIMATES
Based on the location and the age group you selected, 
Sendai, Japan; ← 미야기현 센다이 지역의 경우
Adult greater than 17 years old, ← 어른의 경우

your radiation dose estimates for the 60-day period are:
Whole-Body Radiation Dose:0.12rem = 1.2mSv
Thyroid Radiation Dose:1.20rem = 12.0m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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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DOSE ESTIMATES
Based on the location and the age group you selected,
Tokyo, Japan; ← 도쿄의 경우
Adult greater than 17 years old, ← 어른의 경우

your radiation dose estimates for the 60-day period are:
Whole-Body Radiation Dose:0.046rem = 0.46mSv
Thyroid Radiation Dose:0.52rem = 5.2m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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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DOSE ESTIMATES
Based on the location and the age group you selected,
Tokyo, Japan; ← 도쿄의 경우
Child less than 1year old,  1살 미만 신생아의 경우

your radiation dose estimates for the 60-day period are:
Whole-Body Radiation Dose:0.079rem = 0.79mSv
Thyroid Radiation Dose:1.20rem = 12.0mSv



데이타를 그림으로도 보여주는데, 
↑ 도쿄, 신생아의 경우, 전신 누적 피폭선량  ↑ 도쿄, 신생아의 경우, 갑상선 누적 피폭선량

NRC의 규제상한과 비교해서 보여준다. 일반인 연간 피폭상한 0.1 rem = 1mSv
그러나 연간상한과 60일간 피폭한 양을 비교하는 셈이 된다.

이하에는, 이바라키현과 도쿄 지역만 골라서, 연령별 데이타를 모아서
표로 작성해본 것이다.

이바라키(茨城)현
(쪼시항, 이시오카시, 미토시, 쓰쿠바시, 햐쿠리기지, 나리타 등에서 측정)
신생아  ~ 1세미만     전신:0.14 rem     (1.4 mSv)    갑상선:2.30 rem  (23.0 mSv)
1세이상 ~ 2세미만    전신:0.16 rem    (1.6 mSv)    갑상선:2.70 rem  (27.0 mSv)
2세이상 ~ 7세미만    전신:0.104 rem  (1.04 mSv)   갑상선:1.70 rem  (17.0 mSv)
7세이상 ~12세미만   전신:0.074 rem  (0.74 mSv)   갑상선:1.00 rem  (10.0 mSv)
12세이상~17세미만   전신:0.071 rem  (0.71 mSv)   갑상선:0.96 rem  (9.6 mSv)
어른 (17세이상)        전신:0.075 rem  (0.75 mSv)   갑상선:1.00 rem  (10.0 mSv)

도쿄(도심쪽)
(아카사카 프레스센터, 뉴산노호텔미군센터, 미국대사관 등에서 측정)
신생아  ~ 1세미만     전신:0.079 rem  (0.79 mSv)   갑상선:1.20 rem  (12.0 mSv)
1세이상 ~ 2세미만    전신:0.09 rem    (0.9 mSv)    갑상선:1.40 rem  (14.0 mSv)
2세이상 ~ 7세미만    전신:0.061 rem  (0.61mSv)    갑상선:0.86 rem  (8.6 mSv)
7세이상 ~12세미만   전신:0.046 rem  (0.46 mSv)   갑상선:0.53 rem  (5.3 mSv)
12세이상~17세미만   전신:0.044 rem  (0.44 mSv)   갑상선:0.50 rem  (5.0 mSv)
어른 (17세이상)        전신:0.046 rem  (0.46 mSv)   갑상선:0.52 rem  (5.2mSv)
 
도쿄(요코타 기지) (서쪽 및 사이타마)
(아사카기지, 후쮸통신시설, 후카야통신소, 오오와다통신소, 타마서비스시설,
유기통신소, 도코로자와기지, 요코타비행장 등에서 측정)

신생아  ~ 1세미만     전신:0.088 rem  (0.88 mSv)   갑상선:1.20 rem  (12.0 mSv)
1세이상 ~ 2세미만    전신:0.099 rem  (0.99 mSv)   갑상선:1.40 rem  (14.0 mSv)
2세이상 ~ 7세미만    전신:0.071 rem  (0.71mSv)    갑상선:0.88 rem  (8.8 mSv)
7세이상 ~12세미만   전신:0.055 rem  (0.55 mSv)   갑상선:0.54 rem  (5.4 mSv)
12세이상~17세미만   전신:0.053 rem  (0.53 mSv)   갑상선:0.51 rem  (5.1 mSv)
어른 (17세이상)        전신:0.055 rem  (0.55 mSv)   갑상선:0.53 rem  (5.3mSv)

2011년 3월~5월 사이에 도쿄나, 사이타마, 이바라키 등에 있었다면
60일 사이에 저 정도의 누적피폭량이 되었을 것이라는 건데,
2달 사이에 일반적인 민간이 연간 피폭한도의 몇배를 피폭했다는
얘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데이타를 실제로 내밀면서,
미국 국방성은 병사들에게 큰 영향이 없으므로, 건강조사를 더 할 필요가
없다고 했대는데.. 병사들 열받을 수도 있겠군..

미군들은 80일간 작전수행하다가 떠났다는 거고,
더구나 방사능 구름 덮쳐오는거 알아차리고 피했다는건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던 일반인들, 섬숭정부놈들이 SPEEDI 숨긴탓이지..
그뒤로도 계속 일본땅에 있었던 사람들은 더많은 누적피폭이 됐을거..
도쿄나, 센다이에도 교민들 있을거고..

[미국 시리즈 기사]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1


미 해군이 도쿄전력을 제소한 소송에 대해서, 미국 인터넷신문 The Huffington Post가
초기부터 보도하더니, 오랜 경력의 저널리스트 Roger Witherspoon에 의한 글을
시리즈로 게재하고 있다. 그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된 것을 인용하는 형식이다.

도모다치 작전 당시의 미군측 상황을 자세한 취재로 쓰고 있어서,
궁금한기도 했던 그들의 속사정이 엿보인다.
전체 글은 Part.4까지 있다.

◇◇◇◇◇◇◇◇◇

2013.1.31 Energy Matters(Blog) by Roger Witherspoon(Journalist)
A Lasting Legacy of the Fukushima Rescue Mission:
Part 1 Radioactive Contamination of American Sailors


(2013.2.1 Huffington Post에도 게재)

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1. 미 해군의 방사능오염


미 국방성은 후쿠시마 사고원전이 방출하는 방사성물질로 인해, 일본내 주류하는
7만명 가까운 미군, 정부직원, 그 가족, 기타 관계자들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전대미문의 그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의 등록 데이타를 갱신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일본내 63곳 기지나
군사시설에 배치된 해병대, 육군, 공군, 공병대, 해군, 그리고 일본에서 사는 가족들에게,
장차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후쿠시마 원전사고와의 관련을 증명할 기록이
갖춰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동시에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Ronald Reagan호 승무원 수천명의 해군과 해병대
에게도, 장차 방사선 피폭에 따른 건강장해가 발생할 경우에, 후쿠시마 원전사고와의
관련성을 증명할 공적기록이 작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7함대 소속인 이들은 남태평양에서의 임무를 뒤로하고, 일본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전개할 "도모다치 작전"을 위해, 태평양을 북상했다.
이 작전은 거대지진과 거대 쓰나미가 동북지방 태평양 연안에 괴멸적인 피해를 야기하고,
2만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상황에서, 80일간에 걸쳐, 인도적 입장에서 구원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구원활동은 일본정부의 요청으로, 미국 국무성, 국방성, 원자력규제위원회,
에너지성에 의한 조정을 거쳐, 실시됐다.

이들 함대는 5,500명이 타고있는 항모 Ronald Reagan호, 4척의 구축함 Preble, McCampbell, Curtis Wilbur, McCain, 그리고 순양함 Chancellorsville,
기타 몇척의 함선으로 구성돼있다.

도모다치 작전에 참가한 지상의 트럭부대 운전병들과 헬기 승무원,
항모 탑재 항공기, 상륙정까지 이들은 모두 끊임없이, 방사능 구름이
어디로 흐르는지 파악해서,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여러 이유로 인해,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적어도 국방성 관계자의 증언과 기록에 의하면, 오염돼버린 해역을 항해하면,
피폭과 오염을 피할 수 없으며, 후쿠시마 주변에서 헬기를 날리면,
곧바로 방사능 구름속으로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일은 터지고 말았다.
도모다치 작전에 참가한 장병들 중에 150명의 남녀가 수많은 건강상의 문제를
갖게 되었다. 이 작전에 참여하여 방사선 피폭한 뒤로, 종양, 손발의 떨림, 내출혈,
탈모 등의 증상을 호소하게 됐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발생한 상황에 대해, 미 해군측에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 대신 후쿠시마 사고원전으로부터 방출되는 방사성물질의 확산상황에 대해,
미국측에 허위보고를 했다며, 도쿄전력을 상대로 소송을 일으킨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방사선 피폭에 관한 공적 기록을 말소한 국방성도 고발했다.

항모 Ronald Reagan호의 항해사로서, 조타담당 Maurice Enis와,  Jaime Plym의
설명에 의하면, 해상임무는 명확히 구분돼있다.
당시 항모 갑판에서 측정된 방사성 핵종의 양이 위험한 수준에 달해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소수에 불과하며, 해류가 얼마나 많은 양의 방사성물질을 흘리고 있는지
아는 자는 전혀 없었다. 경보가 울리고서야 비로소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됐다.

  Jaime Plym

"함내에서 쓰는 물은 탑재된 탈염장치로 만든다."
플로리다주 St. Augustine 출신 28세 Plym이 설명한다.
"물은 바다에서 퍼올리는데, 알다시피 바다가 오염된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퍼올린 물에서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몇번이고 오염제거작업을 한다."
"원자력항모는 원자로를 탑재하고있으며, 물로 냉각한다.
항모의 원자로를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방사성물질로 오염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오염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일단 오염된 해류가 없는 먼곳까지 퇴각하고,
거기서 배관이나 기타부분에 묻은 방사성물질을 씻어내고, 그뒤에 다시
오염이 적은 해역을 골라서 일본연안에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Maurice Enis

"우리는 항해도에서 오염된 해역을 확인했는데, 그런곳을
뚫고 항해하는 것은 골치를 썩히는 일이었다."
Enis가 말한다.
"그러나 민간선박들은 그럴수도 없었다. 어디가 위험하고,
어디는 안전한지, 그들은 입소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좀더 알고는 있었다 해도, 그당시에도
도쿄전력으로부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만 듣고
있어서, 실제로 얼만큼의 방사성물질이 방출되는지,
제대로 알수 없었다."

"우리는 약80일간 머물렀다. 일본 해안선에 3km 거리까지 접근했다가,
다시 멀어지곤했다.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에 따라, 술래잡기 같았다.
우리는 구원을 필요로하는 일본인들을 돕기 위해, 매번 되돌아왔는데,
그러다가 우리는 위험한 지역에 가게 됐다. 처음으로 위험을 겪을 때,
도쿄전력은 방사선 우려가 없다고 전하고 있었으나 ,
우리는 방사선을 확인하고는 대피했고, 항시 가스 마스크를 휴대하게 됐다."

방사선에 관한 정보는 해상과 마찬가지로 육상에 있던 미국인들에게도 때마침 파악됐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 Gregory Jaczko 위원장은, 모든 미국인이 후쿠시마 사고원전
80km권밖으로 피난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사고원전 남쪽 약300km 요코스카(横須賀) 미 해군기지에서는,
환경 방사선량이 상승해대는 것을 보고, 국방성이 여성과 애들을 요코스카로부터
피난시켰다.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극히 곤란했고,
사태는 일본의 관료체질 때매 악화되기만 했다.
UCS(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참여과학자 모임)의 핵전문가 2명,
즉 원자력규제위원회와 업계의 컨설턴트 D. Lochbaum과, 핵물리학자 Ed Lyman은,
시시각각 정보가 쌓이는, 혼돈된 상황중에 방대한 양의 정부기관 이메일과 교신기록을
체크했다.

"폭발후의 4호기에서는 사용후연료수조에 충분한 물을 확보하지 못하게 됐다."
Lochbaum이 말했다.
"그래서 미군은 호주에 있던 콘크리트펌프 트럭을 멀리 일본 동북지방의 미공군기지까지
공수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 트럭이 일본의 도로를 달리는 허가가 없다고 해서,

결국 그 차량은 기지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이 처한 엄청난 문제앞에서, 우선순위가 잘못된 꼴이었다."

"일본의 문화는 교향곡에 가까운 듯하다. 모두가 지휘자를 따른다.
이에비해 미국사회는 재즈 앙상블에 가깝다. 모두가 함께 연주하지만,
즉흥연주를 중시하니까."

일본측으로부터 통합되고 신뢰성있는 정보를 얻을 수 없어서,
미국이 행하는 구원활동에 큰 지장이 됐다.

  Michael Sebourn

후쿠시마 남쪽 약200km 아쓰기(厚木) 미공군기지의
헬기부대 상급주임 정비사 Michael Sebourn은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진과 쓰나미가 덮친 후, 우리는 센다이와 후쿠시마에
구원활동을 하기위해, 아오모리현 미사와(三沢)기지로
하루만에 이동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리고 우리 이외의 전부대는 괌으로 피난했다.
그 단계에서 아쓰기 기지는 폐쇄되고, 두번다시
쓰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자가용에 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남기고
가도록 지시받았는데, 두번다시 자기 차를 가지러 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사와 기지에 3주반 머물며, 하루도 쉬지않고
일했다. 출동에 이은 출동, 그 반복속에서 우리 부대는 피해자 구출, 수송, 구원물자 공급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곳엔 몇몇 핵기술자가 있어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병사마다
피폭선량을 스캔했다. 전투복을 잘라내야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Sebourn은 3일간 괌에 파견되어, 집중훈련을 받고, 방사선 담당자로 임명되었는데,
그 임무도 쉬운 게 아니었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방사선에 대처하는 임무라니, 보고듣는 모든 게,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이미 화학전, 생물학전에 대처하는 훈련을 받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방사선에 대처하는 훈련은 받은 적이 없었다.
핵무기 전문부대가 별도로 있는데, 우리는 그런 부대의 경험도 없었다.
공군쪽에는 방사선에 대처하는 경험을 가진 자는 없었다.
방사능오염된 항공기를 다루어본 경험 따위,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한치앞도 보이지않는 가운데 날아가는 격이었다."

Sebourn이 소속된 정비사 그룹에는 규칙이 있었다. 귀환한 헬기는 모두 방사선량
스캔을 하고, 오염된 부품은 떼어내어, 격리된 전용 컨테이너 물속에 담글 것,

미사와 기지에 눈이 오기 시작해서, 부대는 거리상으로 후쿠시마에 가까운 아쓰기 기지에
되돌아오게 됐다. 그 사이 Sebourn은 변화하는 CCPM(Corrected Counts Per Minute)
단위의 방사선량을 추적했다.

"평소 외부 방사선량은 5~10CCPM이다. 그것은 주로 태양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아쓰기 기지의 배경 방사선량은 200~300CCPM 이었다. 온통 맛이갔다.
물에서도 방사능, 땅에서도 방사능, 공기중에서도 방사능이었다."

"규칙에서 500CCPM 넘는 물건이 잇으면, 전용 장갑을 착용해야한다.
1,000cpm을 넘을 경우에는 방호복을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5,000cpm을 넘으면,
완전무장을 해야한다. 방호복, 방독면, 고글에다 장갑을 2중으로 해야한다."

"오염된 라디에이터를 다시 헬기에 장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교환해야만 한다. 나는 60,000CCPM 나온 라디에이터를 떼낸 것을 기억하고있다."

그러나 마침내, 방사선 방호장비가 부족해지는 사태에 처하게됐다.



"도모다치 의료기록(The Tomodachi Medical Registry)"은 Vermont주 상원의원이자,
퇴역군인문제위원회 위원장 Bernie Sanders에 의해 발의되어, 약2년에 걸쳐 국방성,
에너지성, 퇴역군인원호국이 편찬하여 2012년말에 완성됐다.
https://registry.csd.disa.mil/registryWeb/Registry/OperationTomodachi/DisplayAbout.do

그것은 철저한 조사기록으로서, 후쿠노빌 1호기~4호기가 몇달에 걸쳐
대기중과 바다에 방출한 방사성물질, 특히 방사성요오드와 세슘에 피폭된 후에
장기적인 영향이 있었는지 판단하는 의학적 근거를 만들기위한 것이다.

도모다치 의료기록은 유례없이 깊이있는 자료가 됐다.
국방성이 방사선 피폭선량을 조사한 252페이지 부분을 보면, 피폭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7만명의 미국인의 피폭선량을 산출했는데, 후쿠시마 사고원전과의 거리를 포함해,
담당업무와 관련한 호흡속도, 기상변화, 성별, 신체조건별, 연령별, 등의 여러 요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애들 항목에선, 피폭민감도가 다른 6단계 연령별로 분류했다.

나아가, 도모다치 의료기록은 "8천명 이상에 대해 내부피폭 방사성물질량을 조사한 결과와,
산출한 피폭선량을 비교했다"고 한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국방성은, 전신 및 갑상선의 최대피폭선량 산출값이
추가검사를 해야할 만큼 심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해군 대변인 Matthew Allen 대위는, 서면으로 이하와 같이 전했다.
"국방성은 산출한 피폭선량의 정확성에 대해 크게 자신하고 있다.
매우 신중하게 노출조건을 설정한 결과다.
즉 방사선량이 올라간 환경에서 60일간 하루24시간 실외에서 생활하며,
호흡은 평소보다 많은 경우를 설정한 것이다."

"산출한 피폭선량에 대해, 퇴역군인문제위원회(the Veterans’ Advisory Board on Dose
Reconstruction)의 방사선피폭 전문위원, 그리고 전국 방사능방호측정위원회(the National
Council on Radiation Protection and Measurements)에 의한 면밀한 검증이 있었다.
양측모두 계산방법은 적절하며, 결과는 정확하다고 인정했다.
또한 일본정부, 세계보건기구(WHO)의 계산결과와도 일치한다."

국방성 대변인 Cynthia Smith는 국방성의 결론으로서, 당시 심각한 오염은 없었다고
말했다. "2011년3월11일 또는 그후에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방사성물질이 방출된 일본본토
또는 인근지역에 있던 미군 관계자 중에서, 건강조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다."

  D. Lochbaum

그러나, 당시 일본에 있던 남성, 여성, 애들에 관해,
앞으로 계속적인 조사를 필요로 할만큼의 대량의 방사선은
방출되지 않았다고 하는 국방성의 일괄적인 결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방사능오염은 균일하게 퍼지는 게 아니다."
Lochbaum이 말했다.
"핫스팟과 저선량지역이 있는데, 자기가 고선량지역에
있는지, 저선량지역에 있는지 파악했던 사람은 없다.
개인별로 실제 피폭선량을 누가 알겠는가?
그들이 먹은 음식물의 방사선량을 측정하지도 않았다."

"해군이 알고있는 몇몇 데이타를 토대로 모든 그룹에 대해 적용하는 조사방법은
현재 취할수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들은 많은 측정을 했지만, 그것은 한시점의
한지역을 나타낼 뿐이다. 야간에 플래시촬영하는 것에 빗댈수있다.
플래시를 터뜨릴 때마다, 한곳 한곳 촬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둠에 싸인 전모를 밝힐수 있겠는가?"
(Part.1 끝)

◇◇◇◇◇◇◇◇◇

이하 지도에서 아쓰기(厚木) 미군기지는, 후쿠시마에서 보면 도쿄 바로 다음이다.
아쓰기 미군기지가 온통 맛이갔다는 것은, 그 직전에 도쿄가 온통 맛이 갔다는 것..



참고 링크↓

2013.3.10 CBS news
http://www.cbsnews.com/8301-18563_162-57573501/navy-vets-say-fukushima-meltdown-made-them-sick/

2013.3.11 The Huffington Post
http://www.huffingtonpost.com/2013/03/11/fukushima-navy-health-problems_n_28555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