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asting Legacy of the Fukushima Rescue Mission:
Part 2 The Navy Life – Into the Abyss
(2013.2.12 Huffington Post에도 게재)
도모다치 작전의 후유증
Part2. 해군 생활이 나락으로
미국정부에게 도모다치작전은, 단지 또하나의 대규모 인도적 구원작전이었다.
당시 가장 가까운곳에 있던 해군함대와 많은 지상요원이, 곤경에 처한 우방을 돕고자
달려갔다. 당시 일본 동북해안은 거대지진과 거대쓰나미로 괴멸되어, 사회기반은 붕괴되고,
2만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
일본어로 친구를 뜻하는 말로 지어진 도모다치작전은, 처음에 대량의 물자보급부터 시작됐다.
육상과 항모 Ronald Reagan호의 항공기팀의 미군장병들에게도 단지 그런 활동으로 보였다.
워싱턴의 시각은 도모다치작전이 오랜 동맹관계를 더 긴밀하게 할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달라졌다.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 2호기, 3호기의 핵연료는 멜트다운되고, 그 과정에서 분출된
수소가스가 폭발을 일으켜, 일본전국에서 방사선량이 검출되게 됐다.
4호기에서는 폭발로 원자로건물 지붕이 날아가, 사용후연료수조가 노출됐다.
그 수조에는 1,500개의 연료봉 다발이 치명적인 세슘, 요오드, 플루토늄 등을 포함하고있다.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NRC) Gregory Jaczko 위원장이
소집한 회의 및 전화회의 의사록을 보면, 모순되는 데이타 앞에, 우려가 심해지는 상황을
나카내고 있었다. 해군이 현장에서 측정한 방사선량은 일본정부와 동전이 전했던 것과
현저히 달랐던 것이다.
NRC는 암흑속을 날고 있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여러개의 원자로가 멜트다운되는 일은
있을수없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긴급상황 모델도 어디까지나 사고난 원전에서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모든 중요 시스템이 정상기능한다는 것이었다.
Jaczko 위원장은 일본국내에 있던 미국인들에게, 침착하게 일본정부가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을 따르하라고 권고했다. NRC는 미국내 기자회견에서, 방사능낙진의 위험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의사록에는 다른 얘기가 있었다.
Greg Jazcko
3월14일 Jaczko 위원장이 주제하던 전화회의가,
Jack Grobe가 가져온 나쁜 소식 때문에
중단됐다. Jack Grobe는 NRC 기술부 차장이었다.
Jack Grobe, "방해해서 죄송한데, 사태가 급박해지고있다.
현사태를 보고 떠오르는게.."
"진짜 문제인게, 풍향이 바뀌었다. 풍향이 바뀌어서,
북동쪽으로 불던것이 남서쪽으로 불고있다.
일본 육지쪽으로, 그리고 도쿄쪽으로다.
그리고 도쿄 남쪽에 있는 항구에 항공모함이 정박중이다.
후쿠시마에서 약280km 거리이고, 도쿄에서 16km인데,
거기서 측정된 방사선피폭량이 12시간동안 10~20mrem(=1.2~2.4mSv/d)에 달해,
갑상선의 경우 5배~10배.."
Jack Grobe, "280km 남서쪽으로 방사능구름이 갔다고 해도, 후쿠시마 사고원전의
방사성물질의 양이나 방출시기와 맞지 않는 것같다."
Mike Weber, "그렇다, 내가 얘기를 듣고 납득되지않는 게 바로 그거다."
Jack Grobe, "그러나, 항모 제독이 우리에게 전해온 숫자는, 여러 측정장치로 검증한 것이다..."
Mike Weber, "이럴수가.."
Jack Grobe, "그들은 원자력항모를 운영한다. 그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였다. 그들은 일본측이 제공하는 데이타를 믿을수 없었다.
이것은 도모다치작전에 참가한 미국인들에게는, 작전기간내내 스스로 알아서
대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두가지 필요에 대처해야 했는데,
폐허가 되고, 사회기반시설이 파괴된 곳에서, 수색과 구조를 수행하면서,
후쿠노빌이 방출하는, 보이지않는 오염으로부터 방어도 해야했다.
국방성과 국무성, NRC 관료들에게 도모다치작전은 성공적인, 단기간 실시된
인도적인 임무였다. 그것은 요청되었고, 기록되었고, 완료되었다.
그러나 지구반대편에서 명령을 수행한 사람들은, 작전의 성공이 남긴 결과와 함께
살아야 하게 되었다. 작전에 참가한 일부 장병들에게 도모다치작전은 경력도,
미 해군에서의 꿈도, 끝나는 것이었고, 다른 인생을 불안속에 살게 된 것이다.
마약중독자의 아들
Michael Sebourn은 아무도 원하지 않은 아이였다. 동네에서도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고,
그대로 가다간 장차 형무소에 들어가든지, 어디서 죽든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그가 미 해군을 만났다.
"내 어머니는 마약중독자고, 아버지는 내가 18개월때 딜러로부터 마약을 훔치려다가
살해당했다." Sebourn이 회고했다.
"우리는 South Carolina주 Charleston의 공영주택에 살고있었다.
계부가 나를 학대하고, 어머니가 번돈을 모두 마약과 술에 써버렸다.
나는 영양실조로, 체중이 모자랐다."
그는 5살때 조부모에게 맡겨졌는데, 2년후에 조부모가 사망했다.
그는 Indiana주 Gary에 사는 숙모에게 맡겨져, 낡은 시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백인 아이로 지냈다.
"나는 인생에서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못했다." Sebourn이 말했다.
"나는 가난해서, 대학따윈 꿈도 못꿨다. 고교졸업후 잠시 공장에서 일했지만
잘되지 않았고, 3개월간 부랑자 생활을 한 적도 있다.
트럭에서 생활하며, 월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잤다."
그는 다시 숙모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불량한 생활을 하고, 법을 어긴 적도 있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몰두할만한 일도 없고, 아무튼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내가 군입대하면 어떨지 숙모에게 상의하자, 숙모는 부엌으로 달려가,
차키를 꺼내오며, 'Let's go!'라고 했다. 이틀뒤 나는 입대했다."
Michael Sebourn
Great Lakes 해군훈련소에서 그는 잘해냈다.
담당업무를 고를 때, 그는 행정을 선택했다.
"뭔가 제대로 작동된 것이다."
그는 1993년에 해군에 들어간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나는 긍지를 되찾았다. 나는 가치관을 얻었고, 성공하게
되었다. 해군근무하기로 한것은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처음으로 나의 집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게 가족이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가족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17년전 그는 일본으로 부임해서, 미사와(三沢)해군항공기지의
생활에 만족했고, 헬기부대 정비주임으로 승진도 했다.
그는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는 지구를 반바퀴 돌아, South Carolina 마약소굴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명실상부한 해군이었다.
운동선수와 음악가
Maurice Enis는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Minnesota주 Rochester 출신의 키큰 아이로,
그의 생활은 스포츠와 체력단련이 중심이었다.
"나는 Rochester Century 고교 육상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200m와 400m 달리기 선수로, 계속하고 싶었다."
"내 코치는 해군출신으로, 복무중에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그것은 매력적인 인생으로 보여서, 나도 해군에 들어갈 생각을 했다.
19살때, 나는 채용사무소에 가서, 입대하면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지 물어보고,
입대하기로 했다. 2007년이었는데, 집에서는 어머니가 많이 울었다.
9.11과 전쟁 때문에 내가 부상당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라고 말했다."
Maurice Enis
"옳은 결단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나를 살렸다.
나는 목적없이 지냈는데, 해군은 내 시간과, 내가 무엇을
할수있고 성취할 수 있는지,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일단 임무에 들어가면, 딴생각을 할 시간따위 없다.
하루가 분단위로 돌아간다. 그러다 하루 24시간을 쉴 때,
나는 무엇을 우선할지 배운 덕분에, 그 시간을 적절하게 써서,
보다 많은 것을 성취할수있게 됐다."
"나는 해군에서 정말 성장했다. 해군에는 육상경기장이나
운동장이 없었으므로, 나는 항해사 및 조타수를 선택했다.
항해술에는 천체를 참고하는 전통적 방법과, 수학과 컴퓨터를 쓰는 새로운 방법이 있다.
모든 항해시스템의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해도에 적용하고, 위성을 이용하면서,
정확한 우리의 위치를 결정한다."
그는 또한 사랑에 빠졌다.
Jaime Plym
Jaime Plym은, 눈내리는 곳과는 너무나 먼 곳 출신이다.
그녀는 Florida주 St. Augustine에서 자랐고, Jacksonville
대학을 2년간 다니며 음악을 전공했다.
베이스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나는 음악을 평생하고 싶었다. 그러나 직업으로 삼고싶지는
않아서, 대학을 중퇴하고 Gainesville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했다. 다시 대학에 돌아가려고 했으나, 내가 음악 장학금은
받았었지만, 다른 전공학과에 다닐 돈은 없었다.
목적을 잃은 그녀는 집에 돌아와 해변을 거닐면서 2007년이
저물도록 지냈다. 그녀에겐 해병대에 입대한 오빠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에게도 그런 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바다로 나가보고싶었다. 큰 배에 타고싶었던 것이다."
Plym과 Enis는 Great Lakes 훈련소에서 같은 반이 되었고, 나중에 같은 임무가 되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싶은지 열심히 생각했다. 조타수에 대해 배웠는데, 함교에서 일하며,
항해전체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선택했다."
항해술은 항공모함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른 함종이라면, 항해사들은 바람과 해류를 확인하면서 최적 항로를 택하는 게
어렵지 않다. 위험이 닥쳤을 때, 예를들어 방사능구름이 천천히 다가올 경우에는,
특히 중요해진다.
항공모함의 항해사들은 그다지 여유가 없다.
길이 400m나 되는 갑판이 파도를 따라 오르락 내리락,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내내
최대한 조용한 해역을 찾아내서, 안정을 이루어야 한다.
항공기가 발진한 뒤에는 그곳에 머물러, 귀환시에 헤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바람과 해류를 따라 방사성물질이
다가올 경우, 항모는 피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훈련을 마치자마자, 남태평양에서 기동부대 기함인 항모 Ronald Reagan호의 조타수 및
항해사로 임무를 시작한 그들은, 자기들에게 그런 사태가 기다리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즐거운 일이 많았다." Plym은 말했다.
"우리는 처음엔 친구사이였고, 점차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2011년3월11일, 쓰나미가 일본 동북해안을 덮칠 때, Ronald Reagan호와 제7함대
항모기동부대는 한국 항구를 향하고 있었다.
"방향을 바꾸어, 일본에 구원활동을 가게 된 것을 곧바로 알게 됐다." Plym은 말했다.
"다음날 오전5시까지 우리는 현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해 몰랐다." Enis가 말했다.
"육지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인터넷이나 전화 등 외부접촉을 하지 않았었다.
우리는 단지 엄청난 위기가 발생했다는 것만 알고있었다. 본국으로부터 함장에게
현장에 방사능오염이 위험성이 있다고 전해오기까지, 원전에 관해 몰랐다.
그제서야 우리는 방사능누출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 : 방사선
도모다치작전은 주미일본대사관이 Kurt Campbell 동아시아·태평양담당 국무차관보에게
구원요청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Campbell은 곧바로 원자력규제위원회(the 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NRC)
Gregory Jaczko 위원장, Mike Mullen 합참의장 등과 협의했고, Mullen은
악화되는 일본상황에 관해, 계속 Barak Obama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구원활동으로 시작되었으나, 후쿠시마 제1원전의 6개 원자로 중의 하나, 1호기가
방사성물질을 방출하면서, 상황은 곤란해져갔다. 적어도 또다른 3개의 원자로가
절딴나버릴 위험이 있었고, 4호기 사용후연료수조에는 1,535개의 핵연료 다발이
담겨있었다.
3월12일 Ronald Reagan호와 제7함대 기동부대가 후쿠시마해안 3km앞에 도착했을 때,
후쿠시마 제1원전 원자로 1호기가 폭발했다. 3월14일에는 3호기가 폭발했고,
수소가스가 공통배관을 따라 4호기 원자로건물까지 터뜨려, 사용후연료수조가
노출된 상태가 돼버렸다.
3월15일에 2호기가 폭발했는데, 동전은 1,2,3호기의 핵연료가 멀쩡하다고 발표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핵연료는 녹아서 덩어리가 되어, 원자로 바닥에 흘러내렸다.
일본정부는 사태가 통제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았고, 자위대를 출동시키지도
않았다. 파괴된 4호기 사용후연료수조에 계속 물을 뿌려서, 핵연료 화재와 폭발을
막아야했는데 그것도 하지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 일간지 아사히신문은, 이때의 일본정부와 워싱턴에 있는 일본대사관 사이의
교신기록을 입수했다.
Mullen 합참의장은 후지사키 주미일본대사에게 전화해서, 원자로 냉각을 위해,
자위대를 출동시켜야 한다고 했다.
"미군은 4호기도 위험한 상태라고 판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원자로를 냉각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자위대 출동을 포함해서 말이다."
"미국은 원전사고에 대한 여러 대책이 마련돼있다. 대통령도 현재사태를 깊이 우려하고
있다,.."
http://ajw.asahi.com/article/0311disaster/fukushima/AJ201301280006
(역주:아사히신문 프로메테우스의 덫 영어판 기사 링크. 한글판은 ↓
http://asahikorean.com/article/feature_series/prometheus/AJ201301040096a )
NRC에서는 Jack Grobe가 위기대처팀을 이끌며, 24시간 상황실에서 Jaczko 위원장과
일본에 있는 팀과 계속 회의상태였다.
그들의 예전 시나리오, 즉 한 원전에서 여러개 원자로가 멜트다운되는 사태는
있을리 없다는 것과, 원자로 격납구조물이 방사성물질 확산을 막는다는 생각은,
폭발과 함께 틀렸다고 증명됐다. 그들의 시나리오가 일반시민을 방사능피폭으로부터
지켜준다는 것도 의문이 됐다.
NRC의 회의록에는, 4호기 폭발후, Grobe가 격분해서 말했다.
"원자로 격납구조물이 방사성물질 누출을 막을거란 얘기는 이제 쓸모없게 됐다."
"이것은 일종의 재난훈련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 다만, 모든게 최악으로 치닫고,
어디까지 갈지 상상도 못하는 상황의 경우다."
그러나 NRC가 매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견해는 달랐다.
일반시민에 대해, 위험이 닥칠 일은 없다고 한 것이다.
그와중에 바다에서 해군 함정속 장병들은 도모다치작전을 수행중이었다.
(Part.2 끝)